십자무한(十字無限)。열 십자(十) 그리 간단한 글자가 아니란다
十 열 십자,
우습게 보지를 말라!
몸매가 참한 경상도 아가씨가 짧은 치마 차림으로 서울의 어느 고층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
에는 단 두 사람. 아가씨 옆에는 전라도 총각이 머쓱한 자세로 서있었다. 아가씨가 올라가야 할 층은 10층. 두 손에
짐을 가득 든 아가씨는 때마침 옆에 있던 총각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도움을 청했다.
"보이소! 10 좀 눌라 주이소…." 그러자 전라도 총각이 깜짝 놀란 눈길로 되물었다. "뭐라고라?" 총각은 아가씨의 아
래위를 연방 훑어보며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때 경상도 아가씨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아, 10
좀 눌라 달라 안 캤능교!" 그제야 사태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한 전라도 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리면서 나직이
던지는 말이 "워메, 여기서라…!"였다. 있을 법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
터 마신다더니….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해석으로 잠시나마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총각의 언행이 안쓰럽다.
자고로 '十'(10) 이란
다양하고도 미묘한 의미를 지닌 글자이자 소리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벌어진 해프닝 또한 적잖다. 마누라보다 가방끈이 짧은 한 사내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괜스레 신
문지를 펼쳐들고 이것저것 살펴보던 그의 눈에 멋진 술병이 들어왔고, 술병 위에 쓰인 '○○酒'라는 글자가 궁금했
다. 한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사내는 아이를 불러 신문지를 던져주며 "네 엄마에게 가서 무슨 글자인지 한번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 잠시 후 되돌아온 아이의 전언은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던데요"라
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사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러면 이게 十자인가…!" 이 사내 또한 엘리
베이터 속의 전라도 총각이 무색할 '십자호인'(十字好人)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내의 목불식정(目不識丁)만을 탓
할 수 없는 것이 '十'이라는 자(字)와 음(音)이 그리 단순하고 만만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十'을 단순한 숫자 '10'으로만 여기거나 외설스런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단선적(單線的)인 관점이요,
우물안 개구리식 세계관이다. 十자는 우선 그 외형과 방위(方位)로 미뤄 중심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지향하고 있다.
十은
그래서 '두루' '널리' '완전' '많은' '온갖' 등의 의미를 지니며
'모든'과 '전체'를 아우르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十中八九(십중팔구)
十伐之木(십벌지목)
十匙一飯(십시일반)
...... 등의 한자성어들도 따지고 보면 다들 그런 의미의 변용인 것이다.
十자의 또 다른 참된 의미는 바로 '탄생'과 '창조'에 있다는 것이다. '열 십'이라고 부르는 十字의 뜻 새김 자체에도 '사
방을 연다' '천지의 문을 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十은 곧 '천지창조'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한 것일까. 반면 十은
욕설과 외설로도 많이 쓰인다.
그런데 그 또한 가만히 의미를 따져보면 예사롭지 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사실 외설적인 표현의 十은 여성의 가장
한가운데에 있는 혈(穴)을 빗대어 말하거나 성적인 행위 자체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새 생명을 탄생시
키는 진정한 穴이자 事가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남자의 몸에는 아홉개의 구멍이 있는데 여자의 몸에는 열개의 구멍이 있다. 그래서 十은 창조이면서 완
성이기도 한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10)달을 머물러야 하는 것도 그렇다. 十이
라는 글자와 소리에는 탄생과 완결을 상징하는 우주의 진리와 신비가 숨어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만(卍) 또한 十字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十을 함부로 쓰며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극(至極)과 지천(至賤)은 더러는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엘리베이터 안의 전라도 총각
과 가방끈이 짧은 사내의 언행도 오히려 건강하게 와닿는다.
그런데 우리의 천재시인 김삿갓이 남긴 이 '十字' 일갈은 또 무엇인가.
書堂乃早知 房中皆存物
學生在未十 先生來不謁.
(서당을 일찍부터 알았으니, 방안엔 모두 귀한 분들일세,
학생은 모두 열 명도 못 되는데, 선생이 와도 아는 척도 않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는데 어느 서당을 찾아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김삿갓이 인정머리
없는 훈장과 버릇없는 학생들에게 남기고 떠난 오언절구. 외설적인 언어의 유희가 번득이는 이 한시의 음은 차마 적
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