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침략당하고 있는 우리말, 우리글
출처: blog.chosun.com/wyjoh
다시 공휴일 된 한글날을 맞으며==========
영어에 침략당하고 있는 우리 말, 우리 글
1980년대 한국에 나가 내 책의 국내 출판을 계약할 때였다. ?판사와 계약을 하고나서 그 회사 상무가 나를 데리고 식당에 가서 점심 대접을 했다. 그 자리에서 상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미국 교민사회에서 유명하시다는 조화유 선생님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느닷없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하자 그는 “선생님은 오늘 저희와 두어 시간 같이 있는 동안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셔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재미동포들이 한국에 나가서는 미국물 좀 먹었다는 티를 내느라고 영어를 찍찍 섞어 쓰곤 했는데, 그것을 국내에 계신 분들이 매우 듣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신문, 방송, 인터넷, 심지어 거리의 광고, 아파트 이름까지 영어가 넘쳐나고 있다. 한국서 쓰는 어떤 “영어”는 미국에서 40년이나 살아온 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스킨십, 원샷, 스펙, 블랙 컨슈머, 리베이트, 아이돌 가수, 세리 키즈 등등 영어 같긴 한데, 영어 원어민들이 이해하는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 상당히 많다.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왜 굳이 영어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TV 드라마에서 어떤 포장마차 안에 “물은 셀프하세요”라고 써붙여 놓은 걸 보았다. 물은 손님이 직접 정수기에서 받아 마시라는 뜻인 것 같다. 또 국정원이 “셀프 개혁안을 내놓았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물은 직접 받아 마셔요" "자체 개혁안을 내놓았다“라는 좋은 우리말 놔두고 영어 self를 "셀프"라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옮겨 우리말에 대신하고 있다. 또 기분이 ”좋아진다“를 기분이 "업된다"고 한다. 또 국격을 "높인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모국어 사랑은 19세기 소설가 알퐁스 도오데의 작품 “마지막 수업”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프랑스는 자기 나라 안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외국어 상업광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어를 지키기 위해 1975년부터는 특히 공문서, 과학서적, 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그 좋은 우리말 놔두고 기를 쓰고 영어로 바꿔 쓴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팀(team) 같은 것은 몰라도 얼마든지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것 까지 영어로 쓰는 건 “나 영어 잘한다”고 과시하는 유치한 행동처럼 보인다.
패러다임(paradigm)은 사고방식 또는 발상, 시너지(synergy)효과는 상승효과, 리더십(leadership)은 지도력, 가이드라인(guideline)이나 매뉴얼(manual)은 수칙 또는 조작법, 로드맵(road map)은 계획표, TF(task force)는 특위 또는 특팀, 매니페스토(manifesto)는 공약 또는 선언, 스쿨존(school zone)은 학교지역, 엠시(MC)는 사회자, 모기지(mortgage)는 주택담보융자, 인센티브(incentive)는 유도성 보상, 스모킹 건(smoking gun)은 결정적 증거로 쓰면 더욱 뜻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interchange)를 나들목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고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요즘 종이 신문들을 보면 지면 타이틀을 business, invest, outdoor(s는 빼먹고), sports, entertainment, leisure 등등 아예 영어로 표시하는 신문도 있다.
우리말에 영어를 마구잡이로 수입한 주범은 누구일까? 아마도 영어 좀 한다고 티내고 싶어하는 일부 언론인들과 미국 유학 또는 미국 파견 근무하고 돌아온 사람들, 한국에 자주 드나드는 해외동포들, 그리고 미드(미국 드라마) 번역하는 사람들 등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중에 특히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일부 언론인들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신문과 방송들을 보면 영어가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최근 한 신문에 인쇄된 대문짝만한 기사 제목은
“롯데 피트인 동대문 패션제국 르네쌍스 연다” 였다. 여기서 우리말은 동대문, 제국, 연다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기사를 읽어보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 지상파 TV방송사인 KBS 9시뉴스 도중에 “이슈&뉴스”라고 쓴 화면이 뜬다. “문제점과 뉴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전부 영어로만 제목을 만든 것은 좀 그렇다. 뭐든지 영어로 표시해야 멋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도 그 뜻이 분명하지 않거나 웃기는 게 많다. 대표적인 것이 SBS의 “스타킹”이다. 나는 처음 이 타이틀을 보았을 때 여성 용품 소개하는 쑈인 줄 알았다. 영어로는 stocking(여성양말)이 아니라 Star King인 모양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 스타 중에서도 으뜸가는 스타라는 뜻이라면 top star 또는 superstar라고 해야지 star king은 아니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스타 같은 인기가 있는 왕”이란 뜻은 될 수 있다.
한국 신문 방송에 이렇게 영어가 범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 언론인들은 영어에 능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지난 7월27일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은 특별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오바마는 한국전쟁을 “비기기 위해 목숨을 바친(die for a tie) 전쟁”이라고 자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that war was no tie. Korea was a victory."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 매체의 보도를 보니 전부 Korea was a victory.가 “한국이 승리했다”로 번역되어 있었다.(통신사가 제공한 기사를 전재한 것 같다.) 물론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이긴 전쟁이었다“가 정확한 번역이다. 한 통신사가 번역해서 신문, 방송사들에게 배포한 오바마 연설문 전문을 보니까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가 ”자유는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오역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통신사가 나중에 오역을 발견했는지 그 번역문은 인터넷 상에서는 사라졌으나 이미 오역이 든 그 번역문을 그대로 인쇄한 신문도 있었다.
한국 언론 매체들은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리베이트(rebate/합법적 환불)를 “뇌물성 환불”이란 나쁜 뜻으로 오랫동안 써왔다. 내가 거의 10년 전부터 신문기고문과 인터넷 글을 통해 rebate 대신 kickback(킥백/뇌물성환불)을 쓰라고 권고했지만, 아직도 계속 쓰고 있다. 그냥 “뇌물성환불”이나 “뒷돈” 같은 우리말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엉터리영어 리베이트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언론이 리베이트를 잘못 쓰니까 법무부까지 “의약품 리베이트 전담수사반” 같은 명칭까지 쓰고 있다. 합법적이고 좋은 환불 리베이트를 수사하다니, 영어하는 외국인들이 보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더욱 웃기는 것은 국립국어원이 만들었다는 국어대사전도 ‘리베이트’를 “뇌물성 환불”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또 스펙, 스킨십, 블랙컨슈머, 원샷 등이 아주 많이 쓰이고 있다.
“스펙”이라고 발음 되는 영어 단어로 spec과 speck이 있다. spec은 "투기" 또는 “요행”을 뜻하는 speculation을 줄인 것이고, speck은 “얼룩, 오점, 과일 썩은 부분”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스펙”이 학력, 경력, 자격증 등을 의미한다. 영어 원어민도 모르는 이 스펙을 누가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스킨십”도 마찬가지다. 영어에는 skinship이란 단어 자체가 없다. 그러나 한국서는 “이성간의 신체적 접촉”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접촉” 특히 의사와 환자, 정치인들과 유권자들 간의 직접대화 등의 뜻으로 쓰고 있다.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는 한국에서 “악덕소비자” 란 뜻으로 쓰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흑인소비자”란 뜻은 될 수 있어도 “악덕 소비자”란 뜻으로는 쓰지 않는다.
“원샷”은 영어로 one shot일 것인데, 미국에서는 위스키 같은 비교적 독한 술 “한 잔”이란 뜻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서는 이것이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뜻의 영어는 chug(처어그) 또는 chug-a-lug(처어갈 럭)이다.
한국 언론 매체들은 또 영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해서 쓰기도 한다. 그 한 예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나는 이게 “외상 술 퍼먹고 나서 빚 갚을 걱정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라는 뜻의 농담인 줄 알았더니 post trauma stress disorder (PTSD)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었다. 문제는 trauma(트로오마)를 외상(外傷)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traum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것, 다른 하나는 심한 신체적 부상이다. 그런데 PTSD의 trauma는 큰 정신적 충격만을 가리킬 때도 있고, 큰 부상과 그로 인한 심한 정신적 충격까지 합친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9.11테러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신체적로 부상을 당했거나 부상은 당하지 않았어도 그 엄청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오랫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다면 그런 상태를 PTSD라 한다. 그러므로 PTSD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 건 절반의 번역에 불과하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범죄행위를 보도할 때 “도덕적 해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원래 이것은 moral hazards를 번역한 말인 모양이나 moral hazards는 도덕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공기업체 간부가 협력업체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은 범죄행위이지 moral hazards가 아니다. 이건 원래 보험용어다. 예컨대, 자동차를 임대해 쓸 때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가입하지 않은 사람보다 자동차 사용에 주의를 덜 기울인다. 접촉사고가 나도 보험금으로 수리가 되니까 차를 마구 굴리게 되고, 사고가 나면 결국 보험사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런 것이 moral hazards다. 보험사가 보험료를 산정할 때는 moral hazards를 참작한다. 따라서 moral hazards를 “도덕적 해이”라 번역하는 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요즘 "양적완화"란 말도 많이 쓰는데, 이것도 “통화량증가”라고 번역하는 게 더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양적완화"는 quantitative easing(QE)을 직역한 것인데, 처음 들으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짐작이 안 간다. 이것은 미국 정부 소유 연방준비은행 (FEDERAL RESERVE BANK)이 각종 금융기관이 가지고 있는 국채를 사들임으로써 통화량을 늘리는 것을 가리킨다. 통화량이 늘면 금융기관에 돈이 늘어나 대출금리가 낮아져 서민들이 소비를 더 많이 하게 되고 또 융자를 받아 집도 사게 된다. 그리고 기업들은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하는 등 경제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QE정책을 가끔 쓰는 것이다.
영어를 한글로만 표기하면 더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국립국어원이 만든 외래어표기법은 P와 F 그리고 R과 L을 구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쌍시옷과 사잇 시옷, 복모음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sausage(쏘오씨지)를 ‘소시지’라 쓰고 sign(싸인)을 ‘사인’이라 적는다. 또
Song for You(쏭 훠 유)를 “송포유”, All for You(오올 훠 유)를 ‘올포유’라 쓴다. 나는 이 한글 표기를 처음 보았을 때 무슨 기름 이름인 줄 알았다. 이런 건 차라리 영어로만 쓰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한다.
P와 F를 똑같이 ‘ㅍ’으로 표기하라니까 fact(사실)와 pact(조약)이 똑같이 ‘팩트’로 표기된다. f를 한글로 정확히 표기할 수 없으나 f가 단어 첫 자인 경우는 ‘후’, 가운데 올 때는 ㅂ과 ㅎ을 연달아 쓰면 f발음이 나온다. 예컨대 free는 “후리”, after(뒤)는 “앱흐터”라 쓰면 된다.
R과 L도 똑같은 “ㄹ” 로 표기할게 아니라 fry(기름에 튀기다)는 “후라이”, fly는 “훌라이”라 쓰면 구별이 된다. 문제는 L이 맨 먼저 올 때는 하는 수 없이 똑같이 “ㄹ" 로 표기할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복모음 사용을 금지한 것은 큰 잘못이다. leadership(리더쉽)을 ‘리더십’이라고 써서는 안된다.
한글과 영어를 합성하여 만든 단어를 한글로 표기하면 웃기는 게 많다. erotic scene(이러틱 씨인)을 한국서는 ‘정사신'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scene(씨인)을 '신'이라 표기하니 ’정사신‘이 되어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이름 ?다. 직장에 나가는 엄마 즉 working mom을 한국서는 “직장맘”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워킹맘”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국 신문에서 “직장맘 늘어”라는 기사제목을 보고 나는 “직장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로 오해한 적도 있다.
한국 고유의 인터넷 용어 “리플” “악플” “악플러”도 “댓글” “악성댓글” “악성댓글인”등의 우리말로 바꾸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외국 고유명사를 가급적 현지음에 가깝게 한글로 표기하라고 권하고 싶다.
미국 부통령 성명은 Joseph Biden이다. 이것을 한국 신문들은 “조지프 바이든”이라 쓴다. Joseph은 “조오셉”이라고 표기하면 원음에 아주 가까운데 “조지프”라니, 정말 웃긴다. George Bush도 “조오지 붓쉬”라 쓰면 될걸 “조지 부시”라고 무슨 욕같이 쓴다. 한국서는 s와 sh를 구별하지 않고 다 “ㅅ"으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Gingrich(깅그리치)를 깅리치, Romney(람니)를 롬니, Missouri(미조리)를 미주리, Rockefeller(라컵휄러)를 록펠러, McDonald's(맥다아날즈)를 맥도날드, Roosevelt(로즈벨트)를 루스벨트라고 표기한다. 현지음은 무시하고 글자만 보고 적당히 표기한 것이다. 미국 대학교수가 한국 유학생에게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누구냐고 묻자 한국 학생은 루스벨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President Roosevelt didn't wear a loose belt. He always wore pants with suspension belts,라고 농담을 했다. 번역하면, “로즈벨트 대통령은 느슨한 혁대(루우스 벨트)를 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멜빵 달린 바지를 입었습니다”가 된다. 한국 학생의 잘못된 Roosevelt 발음을 흉내 낸 조오크였다.
영어를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종대왕께서 만들어주신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 글인가를 새삼스레 느낀다. 우리 한글로는 거의 모든 외국어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다 표기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글자로는 Bush를 정확히 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한글로는 정확히 “붓쉬”라고 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국어원은 “붓쉬”가 아니라 “부시”라고 표기하라고 강요한다.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처사다. 잘못은 고쳐야 한다. 우리 후손들로부터 바보 같은 조상들이라는 소리 듣기 전에 빨리 외래어 표기법 고치기 바란다.
한글날에
워싱턴에서
조 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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