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예지신

노인의 오형오락(五刑五樂)

역려과객 2017. 3. 11. 14:12

노인의 오형오락(五刑五樂)



천지에는 사시(四時)의 질서가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는
일생에 시기(時期)가 있지요.

천지가 그 질서를 어기지 아니하므로
만물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거두는
차서(次序)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와 같이 사람도 그 시기를 잃지 아니하여야
일생의 생활과 생사거래(生死去來)에
원만(圓滿)함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유년기(幼年期)에는 문자를 배우게 합니다.

그리고 장년기(壯年期)에는 도학(道學)을 배우며
제도사업(制度事業)에 노력하지요.

또한 노년기(老年期)에는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 들어가서
세상의 애착(愛着) 탐착(貪着) 원착(怨着)을 다 여의고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연마하게 합니다.

이것이 인생에 시기를 잃지 않고
또 노년을 맞이하는 휴양(休養)의 도가 아닌가요?

사람이 늙어 갈수록 고고(孤高)하고 청결(淸潔)하며
품격(品格)을 잃으면 안 됩니다.

이 차서를 잊고 제멋대로의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천격(賤格)입니다.

그리고 자기비하(自己卑下) 속에 몸을 떱니다.

정조시대의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紀)’를 보면,

노인의 다섯 가지 형벌(五刑)과
다섯 가지 즐거움(五樂)에 대해
논한 대목이 흥미를 끕니다.




첫째, 다섯 가지 형벌(五刑)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쩔 수 없이
다섯 가지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① 보이는 것이 뚜렷하지 않으니 목형(目刑)이요,
② 단단한 것을 씹을 힘이 없으니 치형(齒刑)이며,
③ 다리에 걸어갈 힘이 없으니 각형(脚刑)이요,
④ 들어도 정확하지 않으니 이형(耳刑)이요,
⑤ 그리고 또 궁형(宮刑)을 말함이지요.

눈은 흐려져 책을 못 읽고,
이는 빠져 음식을 잇몸으로 호물호물합니다.
걸을 힘이 없어 집에만 박혀 있고,
보청기 도움 없이는 자꾸 딴소리만 하죠.
마지막 궁형은 여색(女色)을 보고도 아무 일렁임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다섯 가지 즐거움(五樂)입니다.

① 보이는 것이 또렷하지 않으니
눈을 감고 정신을 수양할 수 있고,

② 단단한 것을 씹을 힘이 없으니
연한 것을 씹어 위를 편안하게 할 수 있고,

③ 다리에 걸어갈 힘이 없으니
편안히 앉아 힘을 아낄 수 있고,

④ 나쁜 소문을 듣지않아 마음이 절로 고요하고,
⑤ 여색으로 반드시 망신을 당할 행동에서
저절로 멀어지니 목숨을 오래 이어갈 수 있다.

이 ‘오락’은 승지(承旨) 여선덕(呂善德)이
‘오형’에 관해 하는 말을 듣고 심노숭이 반격에 나선 말입니다.

이른바 노인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닌가요!

화를 복으로 돌리는 심노숭의 말은 일품입니다.
생각을 한번 돌리자 그 많던 내 몸의 불행과 좌절이
더없는 행운과 기쁨으로 변합니다.

● 눈을 감아 정신을 기르고,
● 가벼운 식사로 위장을 편안케 하죠.
● 힘을 아껴 고요히 앉아 정신을 수양하며,
● 귀에 허튼소리를 들이지 않으니 마음이 요란하지 않습니다.
● 정욕을 거두어 장수의 기틀을 마련하니 몸이 쾌락(快樂)합니다.




그러면 다가오는 ‘오형’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휴양의 도는 어떤 것 일까요?

사람이 휴양기에 당하여는 생사(生死)에 대한 일과
정신통일이 가장 크고 긴요한 일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오직 수양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오락’을 누리는 방법일 것입니다.

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기어이 보려하지 말 것이요.
② 귀에 들리지 않는 일은 기어이 들으려하지 말 것이요.
③ 보이고 들리는 일이라도 나에게 관계없는 일은 간섭하지 말 것이요.
④ 의식 용도를 자녀에게 맡긴 후 대우의 후박을 마음에 두지 말 것이요.
⑤ 소싯적 일을 생각하여 스스로 한탄하는 생각을 두지 말 것이요.
⑥ 재산이나 자녀나 그 밖의 관계있는 일에 착심을 두지 말 것이요.
⑦ 과거나 현재나 원망스럽고 섭섭한 생각이 있으면 다 없앨 것이요.
⑧ 자기의 과거에 대한 시비에 끌리지 말 것이요.
⑨ 염불과 좌선, 기도, 경전(經典) 공부를 부지런히 할 것이요.
⑩ 무시선 무처선 공부에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휴양의 도를 끊임없이 계속하면
마침내 우리는 해탈(解脫)의 경지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한량이 없고 착심도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일을 착심으로 하면 그 착(着)이 한이 없고,
해탈로써 해결하려고 하면
어떠한 순역경계(順逆境界)에도 괴로움과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일에 해탈을 얻기로 하면
먼저 모든 이치의 근원을 관조(觀照)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진리를 모든 경계에 잘 응용해야 하지 않을 까요?

그 해탈의 도를 한 번 알아봅니다.

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생사가 원래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근본 진리를
철저히 관조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생사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여
죽고 나는 데에 해탈을 얻는 것이죠.

② 자성(自性)의 원리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고락(苦樂)이 원래 없는 자성의 원리를 철저히 관조하고,
진리를 고락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여
괴롭고 즐거운 데에 해탈을 얻는 것이죠.

③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차별과 이해가 원래 공(空)한 자리에서
인과보응 되는 이치를 철저히 관조하고,
그 진리를 차별과 이해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여
모든 차별과 이해에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해탈공부를 해 볼만 하시지요?

해탈하신 분의 심경에는
그깟 ‘오형 오락’의 경계쯤이야 문제가 안 됩니다.

이미 생사를 초월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생사고락이 한 조각 뜬 구름 같고
부평초(浮萍草) 같은 것이니까요.





출처: http://m.blog.daum.net/hl2dwi/8910021?categoryId=827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