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異胎院=>梨泰院)의 환향녀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러 학설이 있다.
우선 효종 때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학설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왜군)이 저지른 만행에서 나왔다.
이태원에는 당시 여승(비구니)들만이 있는 " 암절 " 이 있었는데,
일본군들은 이곳의 여승들까지 집단으로 윤간(輪姦,돌아가며 성폭행)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태원이 한자로 이(다를 이異) 태(아이밸 태胎) 원(집 원院)이라고도 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때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왜장은
인근 운종사라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가토 기요마사
그런데 잠자리에 여자 생각이 났다.
부장
"어디 여자 없냐? 장군님께서 찾으신다."
왜병
"전쟁 통에 기생들도 다 도망간 상황이라.."
그때 부관의 눈에 운종사의 여승들이 들어왔다.
부장
"얌마 저기 여자가 아니면 뭐야?"
왜병
"비구니인데요.."
부장
"당장 끌고와라"
그래서 가토에게 운종사의 여승을 바치고
왜병들도 다른 여승들을 범했다.
그리고 다음날 왜병들은 운종사를 떠나면서
절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병들에게 겁탈 당한 운종사의 여승들은
하는 수 없이 인근 융경산 근처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들 중 몇몇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융경산 밑 토막집을
'이방인의 아이를 밴 집'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운종사 여승들의 불행 정도로 끝날 얘기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전황이 바뀌어 왜군이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자
의주로 몽진 간 선조가 환도하면서
슬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신하
"전하 왜놈들한테 겁탈당한 여자들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선조
"지번에 올라온 장계를 보니깐,
경상도 어디선가는 왜놈들이 가슴을 만졌다고
자기 가슴을 잘라낸 다음에 자결한 훌륭한 여자도 있더구먼."
선조
"그런 여자들한테는 열녀문을 세워줘라"
신하
"하옵시면 수천, 수만명이나 되는
정절을 잃은 처자들에게는 어찌해야 할까요?"
선조
"이혼을 허락하게 하면 어떨꼬?"
신하
"전하, 이혼 당한 여인이 있는 집안을 생각하심이..
만약 허락하게 되면 반대여론 장난 아닐겁니다."
선조
"그래? 그럼 이혼금지령 내려."
그래서 이혼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이제는 남편들이 불만이다.
비록 못난 남자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그딴거 모른다.
정절을 잃은 아내를 갖게된 것만 수치라고 생각할 뿐.
그래서 첩을 맞아 아내에게 소박을 맞게 하던지
아니면 갖은 핑계를 대며 아내를 내쫓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감당할 만한 문제였다.
1607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선조
"어허, 왜놈의 아이를 잉태한 환향녀와
이미 아이를 낳은 여인들은 어떻게 처리할꼬?"
신하
"운종사의 여승들처럼 이태원에 모여 살라 하심이.."
선조
"그게 좋겠구나!"
그리하여 이후로 이태원은
왜인들에게 겁탈 당해 임신한 여자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되었다.
오늘날 이태원에도 외국인들이 유난히 모여 살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역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 연신내의 환향녀
때는 1627년 무섭게 성장한 만주족의 후금은
인조반정을 빌미로 조선을 덮쳤다.
당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명나라 치기에 앞서,
조선을 진압해서 뒷치기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포로를 붙잡아 인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족 100만명과
내몽골을 점령하여 흡수한 몽골족 50만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조선에는 1100만명 정도나 살고 있었다.
이중 후금이 특히 노렸던 것은
바로 조선의 젊은 여자들이었다.
만주족은 이들을 첩으로 삼아 자식도 낳게하고
농사기술도 활용해서 만주 벌판을 농토로 개간할 참이었다.
때문에 두 차례 호란으로 총 60여만명이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 중 50만명 정도가 여자들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대략 5명 중 1명 꼴로 잡혀간 것이었다.)
이때 포로와 관련해서 삼전도에서 나눈
인조와 홍타이치(청태종) 간의 대화가 압권이다.
홍타이치
"조선왕은 약속해라."
인조
"넵"
홍타이치
"내가 끌고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혹시라도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친 자가 있으면 붙잡지 않겠다."
홍타이치
"단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밟은
조선인이 도망쳐 나온다면, 무조건 돌려줘야한다. OK?"
인조
"옛썰"
그래서 데려간 포로들이었는데
이후 문제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포로 식구들이 몸 값을 지불하고
여자들을 하나 둘씩 데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울러 탈출하는 여인네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심양의 소현세자 처소로 가서 읍소 하든가,
압록강을 넘어 맨발로 고향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청나라(후금)에서도
도저히 막지 못하겠다는걸 직감하고
아예 포로들에게 '두당 은 몇냥'이라는 몸값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속환'이었다.
'속환'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들은
대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자 인조는 골치가 아파진다.
인조
"이번에도 이태원에 다 몰아넣어야 하는가?"
신하
"지금은 왜란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끌려간 여자들이었습니다."
인조
"지금은 뭐가 다른데?"
신하
"이번에 돌아온 환향녀들의 대부분은
청나라가 요구하는 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양반 출신들입니다."
인조
"뭐라? 양반넘들이 그렇게도 자기 부인들을 챙겼던가?"
신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여자 쪽 식구들이 데려 온겁니다."
신하
"지금 오고 있는 환향녀를 이태원게 가둬두면
여자 쪽 사대부가의 반발이 장난이 아닐듯 사료됩니다."
인조
"그럼 어찌한담?"
신하
"나라에서 환향녀들에게 면죄부를 내려주는겁니다."
인조
"어떤 방법이 있을꼬?"
신하
"일단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자들을 홍제원 냇물(연신내)에서
몸을 씻고 한양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연신내 목욕 면죄부'가 시행됐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
이후에도 사대부들의 '이혼 허락'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인조는 이러한 사대부들에게 이런 교지를 내린다.
인조
"그럼 첩을 둬."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 남편이 첩을 둔다는 말은,
곧 "소박을 맞는다"와 동격의 의미였다.
때문에 당시 환향녀들은 시댁의 눈총 속에서 살아가거나
이런 저런 핑계로 이혼을 당해야만 했다.
급기야 주변의 손가락질에 목을 매거나
은둔하여 비구니로 사는 이들도 속출했다.
오늘날 '환향녀'라는 단어가 '화냥년'으로 바뀌면서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를 빗대는 욕으로 발전하게 됐으니,
당시 '환향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찌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호로자식
환향녀와 관련해서 이런 문제도 있었다.
신하
"전하 문제가 있사옵니다."
인조
"홍제원 냇가에서 목욕하고 나오면 처녀로 인정한다니깐 그러네.."
신하
"하오나 오랑캐의 아이를 밴 여자와
오랑캐의 자식을 데리고 온 여인들은 어찌할까요?"
인조
"뭐야? 이런 호로(胡虜 : 오랑케의 포로) 자식 같은 경우가.."
당시 환향녀에 대한 멸시는 그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져서
'오랑캐 포로의 자식'이라 하여 '호로자식'이라 불리웠고
평생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 우리나라 욕의 유래
'화냥년', '호로자식'과 같은 욕들의 기원을 살펴본다.
육시랄 놈
육(戮:죽일 육) + 시(屍: 주검 시)로서 '부관참시' 당할 녀석이라는 뜻이다.
부관참시 당한 인물로는 수양대군의 오른팔 한명회와
성종 때 사림파의 핵심이었던 김종직이 유명하다.
오살할 놈
오살(五殺)은 몸을 다섯 토막 내서 죽인다는 뜻으로
능지처참 중 '거열형' 이라는 끔찍한 처형을 당할 녀석이라는 뜻이다.
거열형을 당한 대표적 인물로는 김종직의 제자였던 사림파의 김일손,
인조의 오른팔이었던 간신배 김자점,
'허난설헌'의 동생이자, 홍길동전의 작가였던 허균이 있다.
경을 치다
얼굴이나 팔뚝에 칼집을 내고 먹물로 죄명을 찍어내는 형벌을 말한다.
자자(刺字 : 문자를 세기다)형이라고도 한다.
해신에서 송일국이 받았던 형벌,
추노에서 도망노비에게 찍었던 낙인이 경을 친 예다.
우라질 놈
원래 '오라질 놈'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오라'는 죄인에게 결박했던 붉은 줄을 뜻하니
'우라질 놈'이란 원래 '오라에 묶일 놈'을 뜻한다.
염병할 놈
염병은 '장티푸스'를 뜻하는 병이다.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며 극심한 탈수 증상을 경함하는 이병은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었기 때문에 걸리면 치사율이 90%였다.
한마디로 '저주스러운 욕'이다.
경상도 쪽에서는 '옘병'이라고도 부른다.
▲ 장티푸스는 대부분 수인성으로 발생하여, 상하수도가 보급되면서 사라진 병이다.
병신 육갑한다
육갑(六甲)이란 60살을 뜻하고 (환갑을 육갑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꽤나 장수한 나이 축에 속했다.
그런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신이
남의 인생을 논한다면? "병신이 육갑을 논한다"라고 했다.
이게 '병신 육갑'으로 축약된 것이다.
젠장 맞을 놈
조선시대 '난장'이라는 형벌은
죄수를 가운데 묶어두고 형졸들이 죄수의 둘레를 돌며 무차별 구타하는 형벌이다.
가혹한 신체적 형벌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두 차례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 난장질
민간에서 멍석으로 몸을 말아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하는 '멍석말이'도 난장의 일종이다.
▲ 멍석말이
그런데 '난장 맞을 놈'이
나중에 '젠장 맞을 놈'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욕이 된 것이다.
● 우리 역사에서 뗄레야 뗄수없는 별종, 노비
우리말에 '별종(別種)'이라는 말이 있다.
근데 이말은 원래 '노비'를 뜻하는 말이었다.
노비는 일반 양인과는 격이 다르다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멸시하며 불렀던 명칭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176414F79A7D00F)
서울 속의 지구촌 한남동이다.
면적 2.99㎢, 인구 2만 2212명(2008)이다.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속한 동이다.
남산의 남동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응봉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이태원동·보광동 남쪽은 한강과 접한다.
동 이름은 남쪽에 한강이 있고, 북서쪽으로 남산이 있어 한강의 '한' 자와 남산의 '남' 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 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한성부 남부 한강방 한강계(漢江契)로 불렸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한강리(漢江里)에 속하였다가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한남정(漢南町)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한남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한남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의 남북으로 지나는 한남로는 한남대교와 남산 1호 터널로 이어져 강남과 중구 필동으로 연결되고, 그 밖에 강변대로·이태원로·소월길·독서당길 등이 지난다.
하얏트호텔, 순천향병원, 서울모자보건센터, 단국대학교, 이슬람교 중앙서원이 있다,
한강변에는 세심대(洗心臺)가 있었고, 단국대학교 자리에는 조선시대에 화경사(華鏡寺)라는 절이 있어 화경골로도 불렸다. 화경이란 거울처럼 맑은 한강물을 이르는 말로, 이 화경골 뒷산에 화경대란 정자를 세웠다.
한남2동의 독서당길 남쪽은 특히 외국인이 많이 거주한다.
독서당길을 걷다 보면 한남동이 '작은 국제도시'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스쳐가는 목소리 중 우리나라 말보다 외국어가 더 많다. 공을 차며 지나가는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를 기울여보았더니 영어도 아닌 독일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6383D4F79A88015)
독서당길 좌우로는 멕시코와 몽골, 인도, 이탈리아 등 11개국의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웃 이태원동도 서울 용산에 있는 지구촌이다.주로 해밀턴 호텔 주변을 가리킨다.
이태원동이라는 법정동으로 지정되어 있다.이름의 어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효종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태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민간에서는 전란속에 외인들에게 겁탈당해 혼혈인들이 태어난 곳이라고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리운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왜군이 서울로 쳐들어 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금의 이태원이란 곳에 황학동이라는 곳에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여승들이 있었다고 한다.
왜장 가등청정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운종사에 들어가서 그 절의 여승을 탈취하여
그곳에서 얼마동안 머물러 지내다가 그들이 떠나갈 때는 그 절을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때 왜병들에게 겁탈당한 여승들은 그 후 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府君堂)밑에 토막을 짓고 살았다. 이 스님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자 이웃 동네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 집을‘이태원(異胎院)’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어떤 이가 그 동네에다 배나무를 많이 심어 배가 잘 되므로 해서
그 동네를‘이태원(梨泰院)’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는 왜군들이 남해안으로 물러나자 조정에서는 운종사의 여승이 출산한 아이와
각 지역에서 왜군들에게 욕을 당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 이곳에 보육원을 짓고 기르게 하니
사람들이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이전에는 일본군의 기지가 있었지만 한국 전쟁 이후 주한미군들의 주요 위락지대로 번창하여
이 인근에 미8군 기지가 위치해 있다. 이후 외국인 관광객들의 쇼핑, 관광 지대로 번창하여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슬람교 성원인 서울 중앙 성원도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