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랑 장애우랑
‘성’이 대체 뭐길래
사람들은 때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막상 정말로 알고 있는가를 캐물으면 당황해서 우물쭈물 얼버무리거나, 때로는 누구를 바보로 아느냐며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장애인의 성’을 사회적인 공론장에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장애’에 대해서도 ‘성’에 대해서도, 실은 어렴풋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을 뿐 그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데도 너무나 자명해서 굳이 따지고 들 여지가 없다고 넘겨짚곤 한다.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성’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해 보자. ‘섹스’가 ‘섹스’지 뭐겠냐고 내게 되묻는다면, 나는 흔한 우스개로 대꾸하겠다. 신상 기록부의 ‘성별’을 묻는 ‘sex’라는 란에 ‘별 걸 다 묻는다’고 투덜거리며 “일주일에 두 번”이라고 적어 넣었다는 이야기를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저 일종의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외국 영화에서 흔히 가까운 친구나 심지어 혈연을 나눈 친족과의 가벼운 입맞춤을 교환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의 관습으로는 상당히 낯뜨거울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성’이 개입하지 않은 행동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는 전혀 ‘성’이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성’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이 우리 나라에서 몇 주를 지내더니 아주 의아스럽다는 듯이 “한국에는 레즈비언이 참 많다”는 소감을 피력하더라고 한다. 여학생들끼리 길거리에서 어울려 다닐 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이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성’은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자명하기는커녕 아주 모호하다. 그러니 도대체 ‘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때의 실체조차 불분명한 ‘성’에 대한 개념은 잘못된 고정관념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성’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성’이 가시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보았듯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즉 ‘성’이란 특정한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성’이라고 생각하면 ‘성’인 것이고, ‘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이 아닌 것일 뿐이다. 마치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틀림없이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없는 것처럼, 자기 순환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자기 순환적인 개념을 마치 객관적으로 분명한 개념인 것처럼 착각하다 보니 아주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 당사자는 명백하게 ‘성’으로 인식하지만 사람들에게 ‘성’으로 인식되지 않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그 문화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당사자들도 그것이 ‘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기 소외가 일어나기도 한다, 또 반대로 당사자에게는 전혀 ‘성’이 아닌 것을 ‘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역시 이 경우에도 자기 소외가 수반되는데, 가령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폭력을 당했을 뿐인데도 많은 강간 피해자들이 그것을 ‘성 경험’으로 간주하곤 한다.게다가 그러한 고정관념을 사회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성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배제해 버리기까지 한다. 가령 대표적으로 미성년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성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성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줌마, 이렇게 세 개의 성이 있다”라고 말할 때, ‘아줌마’는 (그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명백히 사회적으로 ‘무성적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며, 대개의 경우 ‘노인’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또 이렇게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만 특별히 ‘무성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하게 성적 주체로서 인식되는 성인의 경우라 할지라도 단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계 안에서만 그러할 뿐이며 그 외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무성적 존재’인 듯 행동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만일 ‘무성적 존재’로 인식되는 사람들이, 또는 마치 ‘무성적 존재’인 듯 행동하도록 요구받는 관계에서 이를 무시하고 성적 주체로서 행위하거나 심지어 자신을 성적 주체로서 인식하기만 해도, 그것은 ‘일탈’로 간주되며 사회적 제재가 뒤따른다. 그것이 우리가 사회적으로 용인된다고 간주되는 특정한 범주의 주체 또는 특정한 범주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 보편의 차원에서 ‘성’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한 논의 자체가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부터의 ‘일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단 ‘성’만 자기 순환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똑같은 질문을 ‘장애’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 또한 많은 사람들의 편견 어린 고정관념과는 달리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자명하기는커녕 아주 모호하다. 잘 생각해 보면 ‘장애’ 역시도 그저 많은 사람들이 ‘장애’라고 믿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회 문화적 구성물일 따름이다. 즉 ‘장애인’이란 차별을 위해서든 ‘보호’를 위해서든(물론 이때 ‘차별’과 ‘보호’는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장애인’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일 뿐이다. 가령 ‘왼손잡이’는 일상적인 차별에 직면해 있으며, 오른손잡이를 중심으로 설계된 시설과 도구들로 인해 실질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경험하고 있지만, ‘왼손잡이’는 일반적으로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전이 일어난다. 왼손잡이는 장애인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단지 특별한 요구를 가진 소비자 군으로 인식된다.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골프 용구를 필요로 하는 제한된 범위의 소비자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왼손잡이용 야구 장갑, 왼손잡이용 마우스, 왼손잡이용 악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따라서 실제로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불편’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경험하는 ‘장애’는 상당 부분 완화된다. 요컨대 ‘장애’란 ‘신체적 차이’를 ‘차이’로 보지 않고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반영일 뿐이다.그런데 사람의 몸은 사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런 차이가 발견될 때마다 누군가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작당하여 자신들과 다른 신체적 조건을 모두 ‘비정상’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세상에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불편한 구석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상 생활에서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사회 문화적 관습과 제도가 그의 불편한 점에 대하여 일정한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비장애인’이란 아무런 ‘장애’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는 ‘장애’로 나타날 수도 있는 신체적 조건에 대해 충분한 사회적 협조를 받음으로써 ‘장애’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결국 ‘장애’는 질병이나 사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차이에 대한 사회적 협조의 견고한 차이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장벽을 없애면 장애는 사라진다”는 것이야말로 ‘장애’의 원인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한 언설이다.이렇듯 ‘장애’에 대한 자기 순환적인 고정관념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은, 마치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 또는 특정한 범주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만 ‘성’에 관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 외에는 모두 ‘일탈’로 간주하듯이, 특정한 신체적 조건에 대해서만 ‘정상’ 또는 ‘건강’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와는 다른 신체에 대해서는 ‘비정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실 ‘장애인의 성’을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커다란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는 일이다. ‘장애인의 성’을 이야기하는 일은, 그래서 어쩌면 아슬아슬한 긴장 위에 놓여 있기도 하다.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위에서 살펴보았듯 ‘성’이든 ‘장애’든 모두 ‘정상성’을 핵심적인 매개로 형성되는 고정관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행복한 결합처럼 보인다. 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성’에 관한 논의야말로 ‘장애’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유효한 매개일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로 ‘장애’에 관한 논의야말로 ‘성’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실마리일 수도 있다.하지만 현실은 행복한 상상을 용납하기엔 너무나 냉혹하다. 거꾸로 ‘장애’를 둘러싼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주력하다 보면 자칫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타협해 버릴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자칫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정사실화할 수도 있다. 심지어 더 불행하게도 어설프게 균형을 잡으려다가 양쪽 모두의 고정관념들이 적당히 얼버무려져서 꿩도 매도 다 놓치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장애인의 성’을 이야기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두 가지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실용적인 해결을 구하면서도 근본을 파고들어 천착하며, 끈질기면서도 유연하게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