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여년전 한 청년이 혈혈단신 목감으로 찾아 들었다. 나라의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양주에서 수백리 먼 길을 걸어와 새 둥지를 틀었다.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으셨다. 그분은 우리 고조 할아버지이시다. 그분의 아드님께서는 워낙 노름을 좋아하셔 마나님을 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가 있었다. 조부님의 고종사촌은 초등학교때 수암의 어느 집으로 나를 두 번 데리고 갔는데 그 이후로는 부친과 연락을 했을 뿐 지금은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이다. 증조할아버지는 3남매를 낳으셨는데 삼남매 중 장남이자 삼대독자이신 조부이신 분이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다.
조부님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검소하셨다. 16살 때부터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하셨는데 거기가 시흥군수 댁이었다고 한다. 스무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가 노총각이라고 놀려대서 밖을 못 나갈 정도였는데 23살 때 15살이신 조모님을 만나 11남매를 두셨다. 하지만 조모님은 육이오때 4명의 여아를 잃은 슬픔과 더불어 위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셔서 장손인 나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
조부님은 키도 크고 잘 생기셨다. 유머도 잘 하시고 일을 열심히 하셔 모든 이들에게 칭찬과 아울러 타의 모범이 되셨다. 증조부 때문인지 화투와는 담을 쌓고 사셨다. 우리집은 항상 말 방이었다. 겨울의 기나긴 밤 저녁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화투와 술과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조부님은 구경만 했지 화투는 만지지 않으셨다. 조부님은 쉬는 법을 몰랐다. 비 오는 날도 맷방석이나 빗자루, 멍석, 가마니 등을 만드셨다. 열심히 일을 하셔서 조금씩 땅을 사셨다. 고저지와 새말 데링겨 등의 논밭을 사셨다. 작은 아버지 결혼때 데링겨 논을 팔기는 하셨지만 정말 열심히 사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배를 곪지 않았다.
조부님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다. 인사법을 가르쳐 주셨고, 예의를 가르쳐 주셨고, 특히 약한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오가는 인사법, 중학교 입학할 때 엄마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게 하셨다. 그 덕분에 엄마 소리를 못 해 봤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는 주위를 돌아보라 하셨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술의 예법을 가르쳐 주셨다. 조부님께서는 매를 세 번 드셨다. 가령 오학년때 여동생을 보살피지 않았다고 침목 위에 세워 놓고 나는 오학년이라 회초리 다섯 대 남동생은 삼학년이라 세 대를 때리셨다.
기쁨도 함께 하셨다. 몸이 동네에서 가장 약했던 내가 학교나 제대로 다닐까 했는데 열명이 입학했는데 안양중학교 나 혼자 입학하니 기쁘다며 생전 처음으로 호떡을 사 주셨다. 안양공고때도 나 혼자 입학하니 기쁘다며 제기를 사셨고 그날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남사박에 있는 대선유리에 취직을 했다. 비록 6개월 만에 부도가 났지만 첫 월급으로 세 벌의 내복을 사다 드렸는데 조부님께서는 정말 좋아하셨다. 장손에게 처음으로 받아 본 선물일까? 아님 사람 구실을 못 할 줄만 알았던 것이 사람 노릇을 하는데 대한 보답이었을까 흐믓해 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암튼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셨던 가장 존경하는 분이 조부님이시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시자 우리집 가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조부님 돌아가시고 15년 만에 고저지 논을 처분하셨고, 앞밭을 처분하셨다. 새말 밭을 길을 만드니 논과 밭이 올랐다. 부친은 나도 모르게 막내와 상의하고 새말 밭을 파시고 2년후에 돌아가셨다.
부친이 돌아가신지 11년만에 마지막 남아있던 논을 팔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처 앞에서 펑펑 울었다. 조상님께서 남겨주신 물건인데 삼대가 못가 처분해야 했던 아쉬움과 함께 허전함이 밀려온다. 남들은 자수성가하여 가문을 빛내기도 하는데 물려주신 것을 지키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나고 기둥이 되어야 할 장남으로서 부모님 볼 면목이 없어 송구스럽고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에 속이 매우 상하다.
이제 농협 조합원의 직위를 내 놓아야 한다. 조합원에 가입하기가 전엔 쉬웠는데 이제는 까다롭다. 부친께서 남겨 놓으신 조합비가 180만원이었는데 가입비로 500만원을 채우란다. 지금은 거의 1500만원이 되어야 할 듯 하다. 1200만원이 되었는데도 농협에선 조합비를 더 넣어 달라고 재촉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혜택도 많다. 설과 추석때 2~30만원과 함께 여러 가지 선물을 준다. 생일 때에는 미역과 다시마 등을 주고 소금, 떡꾹떡, 마스크등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준다. 작년엔 50주년이라고 공기 청정기를 선물로 받았다. 매년 100여만원의 선물을 받는다. 관혼상제에도 많은 도움을 받는데 이러한 혜택이 없어진다니 정말 아쉬울 뿐이다.
사람에겐 만약이란 말은 필요가 없다. 우리 사남매 나 말고는 열심히 살았다. 둘째는 장남 노릇까지 하며 살았다. 나는 35세에 멈추었다. 그 전엔 조부님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중에는 잔업을 하고 주말엔 학교를 다니며 휴일엔 농사를 도왔다. 농학과를 택한 것도 집엔 농사를 짓고 회사에선 동물약품을 만들기에 가축 생리를 더 배우고 싶었고 더 나아가 대학원에 갈려고 했다. 공장장님께서는 매사에 열심히 한다고 나를 엄청 잘 보셨다. 학교 졸업하면 그리고 대학원까지 졸업하면 모든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격려를 해 주셨다.
사고 이후 5년만에 집에 오니 모든 것이 격리되어 있었다. 가족은 물론 친구도 동네 주민도 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동네 모임도 거절당했다. 나를 받아준 사람은 모친과 윤봉이 뿐이었다. 안 일은 모친께서 밖의 일은 윤봉이가 다 해 주었다. 만일 사고가 안 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나의 전문가가 되어 있겠지. 그러나 부질없는 이야기다. 장남으로서 구실을 못한 내 자신, 소극적인 내 자신, 숟가락 한 번 제대로 못 드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60년을 살아도 지금껏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표현을 잘 못하는 나를 친구라고 윤봉이는 자금도 한 달에 한번 전화를 해 준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그래도 여복은 있구나 싶다. 모친은 나를 편애하셨다. 처 역시 조건없이 사랑한다. 처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릴렉스이다. 나는 전 보다는 덜 하지만 고집이 있고 욱 하는 성격이다. 심근경색이 와서 조금만 신경쓰면 가슴에 통증이 심하다. 그것을 아는 처는 내가 신경을 쓰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나는 하루에 네 끼를 먹는다. 오후 세시경 양배추와 각종 채소를 갈아주고 견과류와 토마토를 준다. 당뇨라서 현미를 먹고 절대로 짜게 하지 않고 국은 될 수 있는 한 안 먹는다. 화장실에서 몇 번 넘어지니까 큰 일 이외에는 화장실을 못가게 한다. 매일 목욕시키고 청소 빨래는 다른 이보다 곱절을 더 하는 듯 하다. 환자가 햋볕 봐야 한다고 매주 물왕동에 휠체어를 밀고 간다. 일흔이 되어가는 몸 약한 처가 내가 안 나간다고 할까 봐 아프다고도 안 한다. 밤새 끙끙 앓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며칠전 처제와 대판 싸웠다고 한다. 처제는 구순이 훨씬 넘으신 장모님을 모시고 산다. 장모님 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처는 가정을 지켜야지 장모님 못 모신다고 했다. 처는 처제가 안 모시면 요양원에 모셔야 한다면서 고성이 오갔다고 한다. 처는 모든 것이 내 위주로 한다. 단언컨대 한 번도 불평없이 한다. 싫은 내색을 하면 편하건만 그런 적이 없다. 내가 하루에 한 두번 안마를 해 줄 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데 그래도 내가 좋단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그 스트레스는 한 달에 한 번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푼다.
이우야 어찌했든 삼대를 못 지키고 조상님이 물려주신 땅을 없애야 하는 마음이 쓰라리다. 아는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5년만 더 있으면 그린벨트도 풀릴 것이란다. 그때가 되면 두 세배 뛰는 것이야 뻔한 이치가 아닌가? 못다 한 꿈을 꿔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허망한 꿈이리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장남인 내 책임이 더 커 가슴이 더 아프다.
내게는 어려서 세 가지 꿈이 있었다. 의사, 공무원, 작가이다. 연필 하나 못 깍는 내가 가장 일찍 접은 것이 의사요, 말을 못해 면접에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두 번째 접었다. 남들하고 대화를 못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72년부터 49년을 쓴 일기 덕분에 낙서 수백 편의 수필과 시조를 썼다. 몇 편의 글을 처에게 보여 주었더니 놀라면서 책을 내란다. 아마추어인 글을 언강생심이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내년에 시조 몇 편을 신춘문예에 응모 해 보련다. 비록 병들고 약으로 살지만 책임져야 할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겠는가? 삶의 목표가 있기에 오늘도 열심히 운동을 한다.
이번 주 일요일이 부친 12주기이다. 항상 1주일전에 연락을 하지만 한 번도 참석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동생들이 고맙다. 불효자로서 유구무언이다. 풍수지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조상님들의 덕으로 이렇게 살고 있음에 죄송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이번 기회에 부친과 작은 아버지께 상석이라도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조상님 송구하고 고맙습니다.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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