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취미생활과 깊어 가는 가을의 한복판

역려과객 2023. 11. 24. 16:46

 

내 글씨는 나 이외에 아무도 못 알아본다. 어느 때에는 나도 못 알아볼 때가 있다. 그만큼 내 글씨는 엉망진창 졸필이다. 오죽했으면 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발로 써도 그만큼은 쓰겠다라고 하셨을까? 손으로 하는 것은 아예 잼병 수준이다. 연필을 깎는 것도 부모님이나 동생들이 깎아 주곤 했었다. 어려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면 동생은 매번 수북하게 따 오는데 나는 늘 잃고 들어온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72년부터 일기를 썼다. 내 딴엔 그 시절도 금전출납부를 만들어 기록을 했었고, 70년대 후반부터 수많은 낙서장인 추억장 3집까지 만들어 시와 기행문 등등 서 내려온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의 시 일부분이다. ‘시오리 길 자전거를 못 타 걸어서 가지요라고 쓴 기억이 언뜻 떠오른다. 군대 가기 전에 대선유리와 반월공단에 취직했지만 회사 두 곳 모두 부도로 그만두고 제대하고 나서 성훈경금속에 다녔다. 반월공단은 33번을 타고 다녔지만 가까운 곳은 웬만하면 자전거로도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거리인데 성인이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자전거를 나는 못타 걸어서 혹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념우표와 기념 화폐를 모으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우표 사기가 힘드니까 선친에게 부탁할 때가 많았다. 주로 세트와 전지를 샀는데 사고 전까지 3000여장을 모았는데 사고 후 집에 와보니 막내의 친구가 많이 가져갔음을 뒤늦게 알았다. 정나미가 떨어져 그 이후 딱 끊었다. 남은 우표와 옛날 돈은 처가 보관 중이다.

 

 

 

제일화학에 다닐 때가 가장 따뜻한 봄날이었다. 동료들도 좋아했고 특히 공장장님께서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다. 점심때면 동료들은 화투의 뻥을 치자고 했고, 공장장님은 장기를 두자고 나를 붙잡았다. 그 시절이 가장 바빴다. 주중에는 잔업을 하거나 술 한잔을 하였고 주말에는 학교에, 휴일에는 농사일을 도왔다. 휴가 때는 여행을 하여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지식을 쌓아갔다. 시보다는 시조를 좋아했고, 내 딴엔 가장 행복했지만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되었다. 회사에서 위험물취급주임, 안전관리자, 소방관리자로 일해 1000일간 무사고로 도와 시에서 표창을 받게 했는데, 담당자인 내가 사고를 내다니... 민첩성 혹은 순발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가장 큰 취미는 독서이다. 젊어서 삼국지 10번을 읽으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재작년 9번째 읽고 더는 못 보게 되었다. 더불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이다. 눈이 나빠져 있었다. 30년간 보던 신문도 끊고 20년간 보던 월간지 좋은생각도 끊었다.

 

 

 

50개월의 병원 생활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 책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주로 대하소설을 많이 봤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객주 등등 이름난 책은 거의 다 본 듯 했다. 친구 고 정우경이 빌려 오고 집에서 올려 보내고 모친은 책 사다 나르기에 바빴다. 오죽하면 책방 주인이 자주 오신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사회복지사, 간호사, 의사까지 책을 빌려 보았다. 사흘에 한 권 1년에 100여 권씩은 읽었다. 그런데 내가 두 번째로 존경하는 법정스님의 책 다섯 권을 샀는데 지금은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수 일전 야구선수 이대호를 좋아하니까 그의 자서전이 나왔다고 처가 사 왔는데 언제 읽을지 가물가물하다.

 

 

모든 취미가 정적이다. 스포츠 관람을 좋아한다. 작년에 재영의 도움으로 이대호를 보려고 수원에 갔었다. TV를 통해서 국가대표 축구는 물론 손흥민 등의 해외축구 그리고 안양의 농구 전주원의 여자농구, 김연경의 여자배구와 신진서와 김은지의 바둑 등등 매일 저녁 TV 앞에 매달려 각종 경기를 본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거의 내 생일이다. 지금도 월요일 밤에는 이대호가 나오는 최강야구를 본다.

 

 

 

40대에 들어서 채팅방이 유행했는데 내가 들어간 곳이 사자성어 끝말잇기 방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들어갔다. 국명, 지명, 인명을 제외한 모든 한자는 허용이 되지만 못하면 강퇴를 시켰다. 그리고 성어를 말해서 다른 사람이 물어 오면 대답해야 하는데 내 실력이 바닥날 즈음 고사성어 책 서너 권을 사서 뒤늦게 공부를 하였다. 방장은 내가 타자가 느리고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강퇴를 안 시켰다. 그리하여 웬만한 고사성어는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안 쓰니 거의 다 잊어 버렸다.

 

 

 

그 당시 번개모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를 많이 불렀으나, 장애인이고 말을 잘못한다고 안 나갔다. 나중에 두 번을 나갔는데 그들도 파벌이 심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어떤 사람이 공개창에다 내게 병신새끼 육갑하네라는 육두문자를 썼다. 열흘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필 타타타를 써서 올리고 2년만에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모친 병 수발을 했다.

 

 

 

모친이 돌아가시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살림을 하자니 어색하기만 했다. 장애인복지관에 계시는 최준분 사회복지사를 알게 되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일주일에 한 번 요양보호사 한 분이 오셨다. 또 그분의 도움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기행문을 써서 복지사님께 드렸더니 그것을 게시판에 올리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도록 하셨다. 그 이후 매주 두 번씩 찾아 탁구를 배우게 되었으나 2년이 넘도록 해도 실력은 그대로 꼴찌이다. 남들은 각종 대회에 나가서 메달과 상금을 타 오는데 나는 늘 그 자리였다. 결혼식이 장애우들도 참석을 했지만 탁구만큼은 나를 상대 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만 두었다.

 

 

 

밤에는 장애우 음방을 했다. 6만여 곡을 다운 받아서 밤 10시부터 내가 하고 12시부터는 대호가 했다. 인숙이는 같은 시흥이라 사흘에 한 번 정도 우리집에 찾아와서 청소를 해 주었다. 선친이 딸내미 왔다고 좋아하셨다. 그 방에 소라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부산에 사는데 내 해운이라는 내 닉네임을 보고 왔다는데 사자성어에 같이 있던 분이었다. 수년간 나를 찾은 모양이다, 번개모임을 주로 우리집에서 했는데 내 생일 전날 소라가 부산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음방식구들과 파티를 하고 놀았다. 소라는 한 번 더 찾아 왔으나 뇌종양을 앓고 난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지금도 한울방 식구들과 연락은 하지만 얼굴 보기는 힘들다.

 

 

 

예전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휴가 때면 혼자 즐기고 기행문을 썼다. 그런데 장애인이 되고 나서 여행은 나와 먼 예기였다. 결혼 전후부터는 다행히 길호. 막내, 인숙이 그리고 장애인인 대호, 진범, 종수씨 덕분에 가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2013년 처 육순을 기념하기 위해 떠난 일박이일의 부산여행일 것이다.

 

 

 

내 취미는 동적이 아닌 정적인 것이 많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언어가 부자연스럽다. 83MBC에서 방송하던 안녕하십니까? 유재국입니다에 응모했더니 책 세 권이 왔다. 방송을 들은 친구도 있었나 보다. 이렇게 글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잘하고 상대방이 못해도 말싸움에서 평생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말 주변이 내겐 전혀 없다.

 

 

 

전에는 잘 알아듣던 처도 요사이는 두세 번 물어볼 때가 많다. 병에 의한 탓이거늘 이라 생각하지만 내 자신이 더 어눌해졌다는 것을 내 자신도 느낀다. 그만큼 혀와 손과 발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다. 가령 취미 중의 하나인 장기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매일 한 두판을 두는데 3년 전에는 2~3급의 급수가 2년전엔 3~4급으로 떨어지더니 작년에는 4~5급으로. 그리고 지금은 6~7급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도쿠라는 숫자 맞추기 게임을 하루에 한 번 하는데 그것도 틀리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양수겸장

 

     이리 가면 마장이요 비켜 가면 포장인데

    진퇴양난 허궁속에 양차로도 소용 없네

    괘씸한 양수겸장에 상대방만 웃음짓네

 

    안타까운 내기 장기 한숨만이 오가는데

    훈수 참 멋있구나! 코끼리가 트였구나!

   에해라 그놈의 장기 정말로 흥미롭다

 

 

 

가을이 깊어졌다. 첫눈도 왔다. 예전엔 단풍 구경도 많이 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강원도, 충청도로 여행을 했었는데 작년엔 병으로 동네 공원만 몇 바퀴 돈 것이 전부인데 올해는 화장실에서 침대에서 떨어져 두 달째 밖을 못 나가고 있다. 왼쪽 다리 전체가 보라색으로 멍이 들어 양약과 한약에 의존하지만 쉽게 낫지 않고 있다. 아무리 집에서 하루에 시간반 운동을 하지만 손과 발이 따라지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인 18일 첫눈이 펑펑 오는 날 한 달 만에 신청한 전동스쿠터가 왔다. 문제는 내 손의 감각이다. 소형차 2593 아반테를 운전한 적이 있었다. 주차를 못해 1층에서는 주차하는데 5분 이상 걸려야 했고, 지하에서는 기물을 많이 박았다. 수리비만 한 달에 수 십만원을 퍼 부었다. 그리고 6년전에 전동휠체어를 샀는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오지 못해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아반테도 아파트 정문에 있는 차단기를 부수고 폐차를 시켰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연습을 못하고 15층까지 판매자의 도움으로 끌고 왔다. 시원치 않은 손으로 하니 판매자인 분이 한숨을 내 쉰다. “이곳에서는 못 하니 밖에다 놓고 연습하며 익숙해질 때까지 지상에다 놓으라하며 떠나갔다. 그날 밤 스쿠터로 밖을 나가다가 아파트 현관문을 다 박살 내는 꿈을 꾸고 나서 잠이 오지 않는다.

 

 

이튿날인 일요일 처가 12층에 사시는 형님을 모셔 왔다. 그 형님은 스쿠터를 타시는 분이다. 그분의 도움으로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올랐지만 양쪽으로 부딪치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간신히 1층에 내려 왔으나 101호 현관문을 박고 뒤로 박고 처의 다리를 치고 나서 형님이 하시는 말씀이 감각이 없어 못 탈 것이라며 운전하기 앞서서 손의 감각을 익히라는 말씀만 하신다. 형님이 15층까지 끌고 올라오셨다.

 

 

 

형님에게 죄송하고, 아파하는 처에게는 할 말이 없다. 병원에 가보라 하지만 일단 파스만 부치고는 뒤 치다꺼리를 한다. 그리고 판매자에게 못 타겠다고 하니까 한숨만 내 쉰다. 등록이 되어 팔지도 못한다며. 새 휠체어와 함께 30만원을 주겠다고 하여 그러자고 합의를 보았다. 수많은 병과 사고로 내 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모든 것을 시중 들어야 하는 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플 것인데 도리어 내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처는 매일 시부모에게도 빌고 또 빈다. “우리 명수 빨리 낳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고 빈다. 소변을 받아 내면서도 짜증은커녕 한 번도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약을 챙기며 당신은 내 신랑이야 이겨낼 수 있어하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친구 동우가 집에 왔다 가더니 우리부부를 보며 인간극장에 추천을 하겠다고 한다. 쓸데없는 소리라며 거절했다. 처에겐 미안한 소리이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추한 꼴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처는 내 생명의 은인이자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처에게 애뜻하다. 처는 하루에도 수없이 사랑한다고 하며 뽀뽀를 한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한없이 놀랄 때가 많다. 처가 가엾기만 하다. 그저 고마워 옷 한 벌을 사 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며 행복해한다.

 

 

 

친구들은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내가 결혼한 것을 부러워한다. 내가 처에게 해주는 것은 하루에 한 번 발안마 해주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딱 한 번 등을 밀어주는 것뿐이 없다. 어제 한 달 만에 걸레질 청소를 해주었을 뿐이다. 처는 매사에 긍정적이다. 마음은 온통 내 건강에 꽂혀 있다. 아무리 아파도 일어나자마자 약부터 챙기는 사람 도재열여사. 내 평생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도여사를 만났다는 것이리라. 그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 처도 이제 나이를 먹으니 힘들어한다.

 

 

 

지난 화요일 스쿠터를 주고 휠체어와 30만원을 받았다. 아깝고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후회는 없다. 내겐 무용지물인 것을.

 

 

 

시흥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을 위한 차량은 희망네바퀴이고,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을 위한 차량은 하모니콜이다. 그런데 지난 9월 경기도 광역이동지원센터로 통합하였다. 그런데 더 불편해졌다. 수요일인 222시 예약이 있어 1220분에 차를 불었더니 오후 140분에 도착하여 지각을 했다. 4시에 끝나 차를 불렀는데 640분에 도착하였다. 기다리기 너무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신경외과에서는 몰핀을 맞을 때가 아니라며 그것을 맞으면 아픔은 덜 하겠지만 나아지지는 않는다며 더 두고 보자고 하신다. 류마티스내과에서는 강직성척추염이 심해졌다며 약을 주는데 먹으면 설사하는데 그래도 도움이 될 것이란다. 뼈가 붙어 있어서 수술은 힘들다고 하며 산정특례를 만들어 주셨다. 정말로 다행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부터 먹는다. 한약까지 먹으면 하루에 7번을 먹는다. 약값이 너무 비싸다. 전립선, 인사돌 등 보조약과 처가 먹는 약까지 합하면 한 달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병원비까지 합하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때가 있다. 내 병은 1년에 60일을 혜택받는데 그것이 많은 힘이 되리라 믿는다.

 

 

 

빨리 나아 건강해지면 마지막 남은 나뭇잎이라도 밖에 나가서 단풍을 보고 싶다.

 

 

 

 

2923년 11월 24일 처와 함께 단풍놀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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