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제일 열심히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KBS에서 방영하는 인간극장이다. 매주 5회씩 방송을 하는데, 주인공들이 매주 바뀌지만 그들의 삶의 원천은 거의 같다. 주인공들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아픔을 딛고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분들이다. 무던히 참고 견디며 사랑과 배려와 따뜻하고 화목한 정과 함께 희망과 감동을 주고 눈물과 웃음을 준다.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친절과 용기와 이타적인 마음 그리고 꾸준함, 성실함이 늘 함께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우리 부부는 인간극장을 통해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우리나라 말에는 좋은 글귀들이 많다. 그중에 아량과 배려라는 단어도 있다. 매스컴에서 연말이면 숨은 미담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리 정치권이 싸워도 우리 국민은 똑똑하고 현명하고 이해심들이 많다. 거창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처 역시도 후원과 봉사 정신이 투철하다. 그런 면에서 나와 일맥상통하다.
96년에 퇴원하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교 선배가 지회장으로 있는 신체장애인협회 안산지부에 들어갔다. 그곳은 안산시 초지동으로 이사 가기 전 수암에 있었다. 오전에는 학업 공부하고 오후에 출근을 하였다. 장애인의 인권을 말하고 장애인들의 권리를 내세워 시와 협의하고 부딪치고 논쟁을 벌이는 곳이다. 6개월 만에 총무라는 직을 받았다. 많은 장애인이 찾아와 상담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그리고 98년에 곰두리 차량봉사대를 만들어 장애인 환자를 태우고 차량봉사를 하는데 내 임무는 주로 고대구로병원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갔다. 그곳에서도 총무직을 맡았다. 그런데 두 군데 다 파벌싸움 즉 권력싸움이 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애인 협회는 자기들 이익만 챙겼다 2000년 초 안산으로 이사를 가서 총무직을 그만두고 한 달에 2만원씩 후원을 했다. 차량봉사대는 시에서 후원금이 나왔는데 끼리끼리 해 먹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그해 장애인의 날에 시장 표창을 받았고 연말에는 곰두리 차량봉사대에서 국회의원 상을 받았다. 얼마 못 가 자기네들끼리 다투면서 봉사대는 깨지고 말았다. 내 결혼식에 회장은 안 오고 총무만 왔다. 총무에게 물어보니 후원금은 회장의 개인 돈으로 착복했다는 것을 뒤늦에 알고 후원금을 끊어 버렸다. 99년 방송대를 9년만에 졸업을 했다. 병원생활을 빼면 4년만에 졸업한 셈이다.
내가 장애인이요 선친이 노인이라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인터넷으로 한국사이버대학에 들어가면서 목감복지관에 도서관 봉사를 하였다. 하필 처가 허리 수술할 때 목감복지관으로 실습을 나갔다. 나만 나이를 먹고 다른 학생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아들 혹은 딸과 갚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했는데 복지관에서 과제를 많이 내 서 타자를 못 치는 나는 새벽까지 타자를 쳐야 했다. 신혼인데 처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교수님이 고생했다며 실습점수를 A+를 주셨다. 지금도 예전만은 못 하지만 안산시장애인복지관과 목감복지관에 15년 넘게 후원을 한다.
처 또한 월드비젼, 민들레국수집, 법련사 등등 여러 군데 후원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처는 우리집 택배 오는 분들에게 빵과 캔커피를 나누어 주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일종의 서비스라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1년에 두 번 경비원과 청소부들에게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처는 자기 과시욕이 없다. 자기보다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 물건을 같이 들어준다. 천성이 착하다는 뜻일 것이다. 봉사가 몸에 배인 듯하다.
옛날의 나는 비교적 총명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 진디. 68년 12월 초에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나왔다. 선생님이 다 외우라고 하셨는데 393자를 반에서 가장 먼저 외웠다. 국민교육헌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이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때 반장이 나를 부르더니 내가 IQ가 가장 높다고 했다 140이란다. 그러면 뭐 하는가? 남들하고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데. 지금도 국민교육헌장과 고등학교때 배운 원소기호는 언뜻언뜻 생각나 외우는데 뒤늦게 배운 고사성어나 사회복지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이제는 약도 처가 챙겨준다. 그렇지 않으면 안 먹을 때가 더러 있다. 처는 늘 그런다. 안 아프면 좋겠지만 아파도 자기가 어떻게든 고쳐 줄 테니 자기 옆에만 있어 달라고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가 차고 할 말이 앖다. 이제는 밥 흘리는 것도 다반사이고 옷 입는 것도 힘들 뿐 아니라 용변 보러 가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넘어진 다음부터는 욕조에 들어 가가가 겁이 난다. 이런 내 자신도 미운데 처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문해 보지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처는 지금도 늘 말을 한다. 건강하게 살다 한 날 한 시에 죽자고 하는데 말처럼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처는 내과,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등등 병원에 간다. 안양이나 안산으로 갈 때에도 새참과 저녁 약까지 챙겨 놓고 간다.
처는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인다. 어제도 볼 일 보러 은행에 갔는데 휠체어를 탄 나를 보고 직원이 따님이냐고 묻길래 처가 하는 말이 더 우습다. “내 신랑이거든요”라고 쏘아부친다. 공원에 가거나 병원에 가서도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 웬만한 여자는 젊어 보인다는 말에 좋아라고 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무조건 내 편이다. 처는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그래서 더욱 미안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사람이다.
2023 11. 27.
코드가 맞는 처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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