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장모님을 떠나 보내 드리고...

역려과객 2024. 4. 14. 17:06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중에서 처를 만난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만나는 친구마다 얼굴이 좋아졌다고 하며 누가 내 얼굴을 보고 환자라고 하겠는가? 얼굴만 보아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친구들은 말한다. 처를 잘 만나서 그렇다며 처의 칭찬을 많이 한다. 일일 4식에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하루에 1시간 반을 운동하는 것뿐이 없다. 겉은 환자 같지 않고 평온해 보인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나는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늘 똑같다. 어려서 따돌림을 많이 받았다. 말을 못 한다고 약하다고 수없이 맞고 다녔다. 커서는 덜 했지만 장애인이 되어서 집으로 왔을때에도 동네에서조차 왕따를 당했다. 그래서 장애인사무실에 나가 사무를 맡았는데 그곳에서도 언변이 좋은 사람을 환영했다.

 

 

우연히 선배의 꾀임에 페인트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선배는 자본이 필요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니까 선배와 후배는 따로 나가 동종의 사업을 차렸고 급기야 나는 모든 것을 잃었고 허울 좋은 법원의 승소 판결만 받았을 뿐이다. 말을 잘 못하니 말로는 내가 이길 수가 없었다

 

말을 못해서 좋은 일도 많았다.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2009년 여름 결혼 2년차 신혼 때였다. 처는 허리 수술을 받아 병원에 누워 있고 나는 목감복지관에 실습하러 나갔는데 과제물이 너무 많아 새벽 세시까지 타자를 쳐야 했고 병문안은 일요일에만 갈 수 있었다, 실습보고서를 제출하고 동숭동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 교수님과 함께 40명의 학우를 볼 수 있었는데 장애인인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일어나라 하신다. 가장 열심히 했다고 하며 내게 박수를 청하신다. 말을 못하는 내가 어물쩍 인사를 하니 모두에게 응원의 박수를 받았고 실습점수는 A+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지 10년만에 두 번째 학위를 받았다.

 

 

지금의 수자원공사에서 일하시는 장인어른을 만난 장모님께서는 젊어서는 호텔의 주방에서 요리를 하셨고 중년에는 양장점을 하셨다. 올해 97세이신 장모님은 세 명의 자녀를 잃으셨지만 누구못지 않게 열심히 사셨다. 병이 들고 연로하셔서 12년 전부터 처제가 모셨는데 처제는 효심이 지극하다. 장모님은 큰따님이신 처가 나와 잘 사는 모습이 너무 좋다며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처가에 갈 때마다 인사만 했을 뿐인데 처가 식구들 모두 정성껏 나를 대접했고, 처제는 언니가 잘 사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갈 때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장모님은 5~6년전부터 병원을 오갔다. 작년부터 치매까지 찾아왔는데 정신은 처보다 더 좋으셨지만 올해는 늘 병원신세를 지셨고 처제는 자기 몸이 망가지면서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처는 늘 요양병원에 모시자고 했지만 처제는 자기가 모셔야 한다는 신념이 굳어진 상태. 처는 처제의 건강을 생각했고 처제의 마음은 변하지 않아 동서와 나는 둘의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돌아가시기 보름전 퇴원하면서까지 집에서 죽겠다고 하시던 장모님이셨는데 사흘 후 처제가 혼절하여 급히 병원에 실려 갔다. 급한 마음에 우리집에서 23일을 처가 모셨는데 장모님께서는 밤새도록 처에게 잠을 못 자게 하셨다. 5분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라 하시고 물과 음식을 찾으신다. 처제가 병이 날 만도 하거니와 허리가 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척추뼈가 두 개나 부려졌다고 한다. 그래도 처제가 모셔야 한다고 했으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급기야 우울증까지 찾아왔으니 유구무언이다. 그리고 당신의 외손이자 내 이질인 길호가 엄마 뜻에 따르겠다며 모시겠다고 하며 모셔갔다.

 

그 후 처가 오가며 길호를 도왔다. 48일 밤 9시 반 숨을 거두셨다.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처와 길호였다. 그 전에 유언을 남기셨고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보여 드렸다고 한다. 병원에 있는 처제가 가장 보고 싶다고 하시며 49재를 지내달라고 하셨단다. 아무것도 못해 드려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서방도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단다. 맏사위는 죄인이 되어 하늘을 볼 수가 없다. 집에서 돌아가셔서 절차가 복잡했지만 동서와 광호 길호가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새벽 두시에 안양 메트로 장례식장에 안치되셨다. 세시가 넘어 내가 걱정이 된 처가 돌아왔다.

 

 

4910시에 나를 씻기고 내 약과 모든 것을 준비하고 희망네바퀴를 타고 메트로 장례식장에 갔다. 동서와 광호 길호는 처제를 퇴원시키려 병원에 갔고 우리 부부만 남았다. 장모님의 영정사진을 보니 환하게 웃고 계신다. 모든 것을 통찰한 분처럼, 꽃 피는 봄에 꽃밭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선녀처럼, 우리에게 아픈 모든 것을 당신이 가져 가겠다는 천사처럼, 하늘에서 우리에게 선한 모습을 일러주는 신처럼, 모든 것을 초월한 부처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그렇게 환하게 웃고 계신다.

 

세시 반에 처제가 퇴원해 왔다. 20여분 식장이 떠나갈 듯하게 운다. 자기가 잘못한 죄인이라며 발버둥 치며 목 놓아 소리높여 운다. 내 예감이 적중했다. 그리고는 물을 찾는다. 이제는 되었다싶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처제는 모든 것을 수긍하는 듯 문상을 오신 손님에게 맞절까지 한다.

 

 

저녁 6시에 염을 한다고 하는데 지하 3층이라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하여 나는 참석을 못했다. 처가 가입했던 보람상조 매니저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맏사위인 나를 대신해 동서가 역할을 해 주었고 저녁 예식과 함께 비로소 상주를 맞이했다. 상조회비는 물가가 올라 280만을 더 내야 했고 많은 문상객들에게 답례를 했다. 원래 3일장은 10일인데 선거라 11일에 발인날로 잡혔다.

 

10일은 총선이었는데 마음은 총선으로 가 있었다. 10여년만에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모든 곳이 결리고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표현을 못했다. 많은 벗들이 찾아왔고  총선은 여당이 100석도 못 채울 것이라고 매스컴은 떠들고 있다.

 

 

내게는 말도 잘 못하지만 다섯명의 절친이 나를 돕고 있다. 종찬이는 초등학교 5학년떼 짝궁인데 내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한 곳이 울산에 사는 종찬이였고 그의 두 딸 결혼식에는 물론 장모님 상을 당했을 때에도 충주로 찾아가고 안산에 올 때나 큰집에 갈 때에도 항상 우리집에 들렀다. 내 회갑 때에도 처가 연락을 했나보다. 단 한 명의 친구 종찬이가 찾아왔을 만큼 가까운 친구이다. 비록 말은 없으나 염화미소인 듯 마음속의 절친이다. 윤봉이는 남들은 외면해도 동네에서 내 손과 발이 되어주는 친구이다. 휠체어가 망가져서 부르면 달려와 고쳐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내가 56회 총무로 일을 했었는데 정기총회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대신 부회장이 발표를 했을 정도로 나는 쑥맥이었다. 친구들은 회비 면제를 시켜 주었는데 뇌경색을 앓고 난 12년 이후로는 나가기 싫어 발길을 끊었다. 대신 병원 친구를 얻게 되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긴 병에는 특히 요양병원에 있는 환자는 서류상으로 이혼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나와 같은 병실에 그런 환자가 두명이 있다. 그 중의 한 친구 두만이는 2012년 같은 해에 뇌졸중으로 입원하여 지금껏 병원에 있는 친구이다. 4~5년간을 함께 병원에 있으면서 일요일엔 술도 한 잔 같이 하는 친구인데 병원비가 부담이 되어 그의 처가 기초수급자로 만들었는데 지금껏 단 하루도 전화를 안 한 적이 없다. 수년 전에 친목회에 가서 전화를 못 받았는데 17통이나 왔다. 아무튼 고마운 친구인데 화환까지 보내주다니 표현을 어떻게 다 하겠는가?

 

장애인 친구인 대호는 음악방송을 하게끔 해 주었으며 장애인에 필요한 기구나 정보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친구인데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1급인데도 불구하고 전국에 안 다녀 본 곳이 없고 배드민턴도 잘 치고 모든 악기도 잘 다룬다. 나처럼 요즘엔 병원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의 처와 함께 가끔 만나 밥도 같이 먹을 정도로 가까운 절친이다. 인숙이는 결혼 전 우리집에 2~3일에 한 번 와서 청소와 빨래를 해 주던 친구인데 요즘 모친께서 투석을 하여 얼굴도 못 보지만 옛날엔 톡으로 많은 도움을 주던 절친이다.

 

 

옛날부터 동네모임인 목우회가 있었다. 지금은 유명무실하여 몇 명 남지 않았지만 12가족이었는데 연락도 제대로 못했는데 11명 모두 문상을 하고 송금으로 조의를 표해 주었다. 그들에게도 다시금 고마움을 표한다. 내 형제는 물론 종형제 모두 참석을 했다. 개인적으로 화한을 보내준 경진이 경석이 두만와 문상을 온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총선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여당의 최악으로 끝이 났다. 한동훈의 보람도 없이 무자비하게 야당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 손님으로 태경이 다녀가고 난 후에 광호와 길호의 수고로 우리도 결말을 지을 수 있었다. 49재 비용이 160만원인데 우리가 100만원 내기로 합의했고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처남댁이 절에 참석을 안 하겠다고 한단다. 종교가 다르니 그 또한 참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지 않은가? 아무튼 무사히 끝이 난 셈이다

 

 

411일 발인식이 끝나고 아침을 먹고 화성에 있는 함백산추모공원으로 갔다. 화성으로 가는 길은 꽃길이었다 벚꽃이 만발하여 자신들을 봐 달라고 폼을 잡는다. 장모님 거시는 길은 꽃들의 천국(?)인냥 모든 자연이 축복하는 듯하다. 날씨마저 도와준다. 이 화창한 봄날에 봄내음과 꽃내음을 맡으며 저세상으로 가는 기분은 남다를 것이다. 극락 혹은 천국으로 가시길 기원할 뿐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처와 처제이다. 처제의 빠른 쾌유를 빌 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힘과 용기를 내라고만 할 뿐이다. 처는 사흘동안 여러번 넘어졌다. 몸이 너무 약해 나보다도 더 잘 넘어지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내 안부부터 챙긴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 두 자매가 털고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오전 11시 화장실로 들어가는 장모님을 마지막으로 보니 처와 처제는 한없이 울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오후 1시경 유골함을 인수 받아서 안양 영각사에 안치되었다. 영각사에 가기 전 장모님이 사시던 곳에 잠시 쉬어서 인사를 드리고 갔다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호상이다. 장모님께서 계실 별나라는 천국일 것이다. 모든 아픔을 가지고 가셨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후 5시경 동서네 가족과 우리는 물왕동에 있는 남원추어탕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처제는 우리집에서 자겠다고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광호와 길호는 집에 가고 우리집에서 셋이 고스톱을 치고 바둑을 둔 후 처제는 자기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여 그들은 떠나갔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었다. 광호와 길호가 수고 많았다. 특히 외할머니의 대변까지 받아내며 일처리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 지은 길호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412일 오전에 길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제가 MRI 결과 척추뼈 두 개가 나갔다고 하며 입원했다고 한다. 길호는 장모님 사망신고까지 했다고 한다. 처제의 건강이 문제다. 처 또한 마움이 놓였는지 충격을 받았는지 아침에 쓰러졌다. 긴장을 푼 탓이겠지 이러다 두 자매가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내 병을 챙길 때가 아니다. 처도 나이 70을 넘긴 노인이다.

 

고등학교 친구 세명만 연락을 했는데 짝궁인 바빴다며 참석 못해 미안하다며 송금과 함께 톡을 보내왔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었고 모두들 수고 많았다. 특히 길호에게 다시금 표한다. 그리고 문상을 오신 모든 분과 보람상조회 매니저님과 직원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꽃을 좋아하셨던 장모님 편한 곳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 그리고 못난 사위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먼 훗날 저도 뒤따라가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2024414

 

벚꽃이 만발하고 봄 향기 그윽한 날 장모님을 보내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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