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5월 보름간의 희노애락

역려과객 2024. 5. 18. 17:13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를 지음이라고 한다. 자신의 거문고 소리에 담긴 뜻을 이해해 준 친구를 잃고 난 뒤 이제 그 소리를 아는 이가 없다며 현을 끊어버린 춘추시대의 어떤 우정은 거기서 나온 말이다. ’지음이란 말엔 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서 듣는다는 뜻도 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랑하는 마음이리라

 

 

장모님도 장모님이지만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잃었다는 고뇌가 불면증으로 변하더니 20여일이 계속 되었다. 막내의 도움으로 안산식물원도 가고 맛있는 것도 찾아다니며 먹었으나 그때뿐이었다. 그래서 정신과를 찾았다. 주치의는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며 다른 약과 충돌없이 주겠다며 약을 주시면서 우울증 2기라며 반드시 고쳐 주겠다고 하신다.

 

약을 먹으니 많이 좋아졌지만 하루종일 졸립다. 약에 취하니 바보가 된 느낌이다. 5일 후에 약을 더 약하게 지어 먹으니 예전의 80%로 돌아온 느낌이다. 10년 전 처도 약 4년간 먹은 전례가 있다. 어느정도 확신이 들었다.

 

사람은 살만하니 떠나는게 인생이다. 5분후를 모르는 것이 인생사 천년만년 살 것처럼 발버둥 치며 살다 예고도 없이 부르면 모든 것을 다 두고 갈 준비도 못하고 가야만 한다. 어느날 갑자기 예의치 못했는데 떠나야 할 운명이 오면 갈 수밖에 없어 이제 살만하니 떠난다고 아쉬워하는 것이 인생사 아니겠는가?

 

 

천년만년을 살 것같이 오늘 못한 것은 내일 해야지 내일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되겠지 기회는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장애인으로서 지금까지 살다 보니 자식의 도리 인간의 도리를 못했으니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앞을 보고 삶을 즐기지 못해 이제부터라도 가족과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고 가 보지 못한 곳 여행도 하면서 줄겁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6일 막내의 생일 겸해서 물왕동에서 술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처와 막내는 취기가 올랐는지 말이 많아졌다. 갑자기 가족들이 생각이 났다. 막내고모와 통화를 하고, 경주고모와도 통화를 했다. 막내가 기왕이면 쇠뿔도 빼라는 듯 이번 토요일에 천안을 들렀다가 경주에 다녀오자고 한다. 서로의 의견이 달랐으나 일단 떠나기로 하고 다음날 천안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확정하기로 했는데 네 명의 의견이 다 달랐다. 나는 경주 먼저 들르고 오면서 천안에 들러 고모부와 고모를 뵙고 오자고 했고, 막내는 당일은 힘드니 12일 하자는 생각이고, 제수씨는 천안만 다녀오면 가겠다고 했고, 처는 나와 제수씨를 감안하여 천안만 더녀 오던지 아니면 경주는 우리가 따로 가자고 한다. 고모님 선물을 쿠팡에 준비했다.

 

 

이튿날 모든 것을 보류했고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천안고모에게는 못 가서 선물만 보냈다고 전화를 하고 경주고모에게는 다음주 목요일에 가기로 했다고 전화를 드렸다. 우리 집안에 어르신은 이제 여섯분만 살아 계시다. 작은어머니 두 분 셋째인 경주고모 내외 두 분과 막내인 천안고모 내외 두 분이 계신데 사거리 작은어머니는 자주 찾아뵙고 인천 작은어머니는 신행때 다녀오고 서먹서먹하다 재작년 뇌출혈이 일어나 중환자실에서 갑자기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르신인 인천 작은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해서 막내와 상의하여 작년 설 무렵부터 찾아뵈어 매년 다니기로 했고, 경주고모와 천안고모부 내외는 승렬이와 재민이 결혼식 때 뵈었는데 경주고모부만 15년을 못 뵈었다. 많이 편찮으시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80을 넘기신 노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더욱 가 보고 싶었다.

 

 

경주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가 보았고 개인적으로도 갔었다. 신혼 때도 선친과 함께 신행으로 찾았었다. 많은 곳을 관람했었는데 지금은 혼자서는 엄두도 못낸다, 집에서는 밥 먹고 운동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인간은 세월따라 익어가고 홀로 왔다 홀로 가는 우리네 인생이라고 했던가? 아름다고 멋지게 늙어가며 무엇이든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갈 때는 똑같이 갈 준비를 못하고 남의 손을 빌어야 하는 것이 소풍이던가?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하고 싶다. 지금껏 하지 못한 일들을 하며 내일 떠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약을 바꾸고 나니 잠도 잘 자고 마음도 편하고 우울증이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바람을 쐴 생각을 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어른을 대접하려고 생각하니 뛸 듯이 기뻤고 처 역시 덩달아 좋아했다. 불면증이 올때에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이러다 잘못되어 정신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4년 전부터 뇌경색이 재발되고 심근경색으로 골수까지 빼는 등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통장 잔고는 기약없이 줄어들고 연금의 1/3이 병원비와 약값으로 들었는데 절반까지 치솟았다. 그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열심히 치료받고 운동도 했는데 우울증으로 모든 것이 싫어졌다. 워낙 숫자에 약한 처에게 얼마 되지 않는 통장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고는 잘 모르면 본가의 재영이나 처가의 길호에게 물어보면 잘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더니 자기 무섭다며 그러지 말라면서 운다. 그래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나도 정신 차리겠다며 달랬다. 다행히 바뀐 약을 먹으면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166시에 목욕을 하고 7시에 밥을 먹고 8시에 희망네바퀴를 불렀으나 여섯 번째란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광명역에 도착하여 경주행 KTX를 탈 수 있었다. 경주역에 도착하니 두 분이 모두 마중 나와 계셨다. 생각보다 두 분 모두 건강해 보여 한시름 덜었다. 고모부는 수면제만 드신다고 하신단다. 고모부께서 택시를 하셨는데 지금은 잘 안 한다고 하신단다. 점심을 사 드리려고 했는데 고모부님께서 바로 고모님 댁으로 가셨다. 순간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분이 걸려 도착하여 절을 하려고 하니 모두 안 받으신다. 고모님은 우리를 위하여 점심 준비까지 해 두신 것이다. 갈비에 푸짐하게 차린 음식 정말 맛있게 먹었다.

 

 

고모부님은 차로 우리를 태우고 보문단지로 가셨다.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와 물레방아 앞에서 사진을 찍고 호수며 안압지와 양귀비 꽃을 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옛날의 나는 기억력이 좋아 첨성대와 분황사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든 것을 기억했었는데 이젠 다 까먹었다.

 

고모와 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끝이 없는데 고모부는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디라고 일일이 설명해 주신다. 5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안압지, 첨성대, 반월성, 천마총, 무열왕릉, 신라대종, 김유신장군묘를 거처 황리단길을 가 보았다. 황리단단길은 젊은이의 거리란다.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에 가 보고 싶었지만 시간 허락이 안되니 멀리서 모습만 바라보았다, 도중에 처가 황남빵을 사서 가겠다고 하니 고모부님이 먼저 내려 황남빵과 보리빵 두 개씩을 사서 주신다. 돈은 아예 받을 생각도 안 하신다. 우리가 대접하려고 내려왔는데 대접만 잔뜩 받았다.

 

 

4시 반을 넘겨 경주역에 도착했다. 처가 커피 넉 잔을 시켰고 마지막 남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대합실에서 고모님 통장번호를 달라고 했더니 안 가르쳐 주신다. 여자들은 무슨 힐 말이 그리 많은지 고모부와 나는 구경만 할 뿐이다. 고맙다고 건강해지면 또 찾아뵙겠다고 하며 인사를 했는데 열차에서 떠나는 모습까지 보셨다. 두 분에게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광명역에서 내려 처가 말하기를 고모님이 봉투 세 개를 주셨단다. 하나는 고모부님, 하나는 고모님, 또 하나는 고모님 친구분이 주셨다고 하신다. 거금이다. 무슨 낯으로 뵐 수 있을까? 한없이 즐거운 날인데 무거운 죄책감이 든다. 기분은 좋았으나 대접만 실컷 받고 오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장애인용 차량을 불렀더니 1시간을 넘겨 왔다. 집에 오니 950분이었다.

 

 

이튿날 고모님께 장문의 글을 써서 보냈더니 처를 따뜻하게 위해 주고 열심히 살라 하신다. 처도 보냈나 보다. 나를 잘 보살펴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단다. 장조카의 도리도 못하고 두 분을 뵌것에 만족하리라.

 

 

내일은 길호가 구경시켜준다고 했고 다음 달엔 목우회에서 12일로 평창을 간다고 한다. 사람은 기분에 좌우되는 것 같다. 좋은 사람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 싶다. 행복과 사랑이 함께 하는 세상을 요즘에서야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장미꽃 한 송이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마음의 꽃 한 송이는 백년의 향기를 풍긴다고 했다. 그 꽃을 사랑하는 고모님께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 우울증을 고쳐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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