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한 이야기

얼려 먹는건 보드카만이 아니다

역려과객 2015. 6. 12. 15:46

냉동실에서 사흘 동안 얼렸다 꺼낸 술병. 6시간 정도면‘얼린 술’을 즐기기 충분하다. /조선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ho@chosun.com

무더운 여름 '얼린 술' 유행

알코올 냄새 약해져 마시기 좋아

도수 높은 술 6시간 정도 얼려야


보드카를 얼려 마시는 일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최근엔 위스키나 코냑 같은 '폭넓은' 양주 얼려 마시기가 유행이다. 최근 유행하는 '얼린 술'이란 냉동실에 오래 보관해 차갑게 된 술을 말한다. 양주를 얼려 마시기란(술을 얼리면 고체가 되므로 '먹는다'고 해야 정확하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술의 주 성분인 에탄올은 영하 114도에서 언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즉 에탄올이 많이 든 양주는 영하 114도까지는 아니라도 매우 낮은 온도를 꽤 오랫동안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만 언다. 

일반 가정이나 식당에서 사용하는 냉장고 냉동실은 기껏 해야 영하 22도 정도. 코냑이나 위스키를 아무리 오래 냉동실에 넣어둬도 고체로 변하진 않는다. 설사 최첨단 냉각기를 동원해 술을 얼리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차가운 '고체' 상태의 술을 입에 넣으면 너무 큰 온도 차이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진짜로 얼린 술을 먹는 건 위험천만한 일인 것이다.

'바텐더비법학원' 류중호 원장은 얼린 술의 기원은 역시 보드카(vodka)라고 했다. "혹독하게 추운 러시아의 겨울, 일부러 얼린 것이 아니라 그냥 바깥에 둘 수밖에 없어서 뒀던 술을 마셔봤더니 알코올 냄새가 덜 나서 마시기 한결 편하더란 것이죠. 또 알코올 냄새가 줄어들면서 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과 향이 강해집니다. 이것이 최근 위스키로, 코냑으로 확산된 것으로 봅니다."

영남대 식품가공학과 이종기 교수는 "술을 얼려 마시면 맛과 향이 진해진다는 건 낭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모든 화학변화는 온도상승에 따라 반응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변합니다. 얼리면 알코올뿐 아니라 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다른 성분의 반응속도가 급속하게 낮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코냑은 잔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 잔에 담긴 코냑을 살짝 데워 향이 풍부하게 올라오게 해 마시는 전통적 시음 방법이 개발된 것입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술을 얼리면 더 달콤해지는 듯한 느낌은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술을 차갑게 하면 점도가 높아지면서 걸쭉하게 응축됩니다. 술이 오그라들면서 알코올 냄새가 줄어들기 때문에 다른 향기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분이 바뀌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달다'고 느끼는 것과 연관된 향을 더 많이 맡는 것이지 실제 단맛이 강해지지는 않습니다."

얼려 마시는 술의 유행은 소비자가 주도한다기 보다 코냑, 위스키 등 양주업체에서 퍼뜨리는 경향이 강하다. 코냑 브랜드 '레미 마틴'은 최근 '레미 마틴 서브제로(Subzero)'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새로 출시된 코냑이 아니다. 기존 판매하던 코냑을 그저 영하 18도로 차갑게 '얼려서' 마시는 방식을 홍보하는 것이다. 코냑업계 관계자는 "코냑은 특히 유럽에서 '아저씨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이 강하다"면서 "젊은 층과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 고민하던 코냑업체들이 2000년부터 코냑을 위스키처럼 얼음에 타 마시는 '온 더 락(on the rock)'을 홍보하더니 최근 얼려 마시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건 '얼린 술'은 차갑고 알코올 냄새가 약해서 여름에 마시기 편하다. 하지만 '얼려 마시기'가 아무 술에나 어울리는 건 아니다. 냉동실에 코냑과 위스키, 쿠앵트로(Cointreu·오렌지향이 나는 리큐르), 소주(희석식)를 사흘 동안 얼려 시음해봤다. 서리가 허옇게 내린 코냑 병을 기울이자 시럽처럼 걸쭉한 술이 흘러나왔다. 입안에서 코냑은 초콜릿 냄새가, 위스키는 오크향이 확연히 강하게 느껴졌다. 보드카는 크랜베리(cranberry) 비슷한 시큼한 과일 냄새가 났다. 오렌지향과 당분을 추가한 리큐르인 쿠앵트로는 술이 아니라 오렌지 주스 농축액을 마시는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알코올 냄새가 한결 덜하다. 술이 약하거나, 더운 여름 알코올 기운이 버겁다면 얼린 술을 시도해볼 만하겠다.

소주는 얼려 마시기 적당한 술은 아닌 것 같다. 냉동실에서 꺼낸 소주병 속에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빙산처럼 떠 있다. 잔에 따른 소주는 냄새나 맛이 거의 없다. 순수한 알코올을 섭취하는 기분이다. 소주에 첨가하는 당분 등 각종 '조미료'가 수분과 함께 얼음에 갇혀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소주 마시는 기분이 나지 않는다. 류 원장은 "소주나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진짜 얼어버리기 때문에 마실 수 없는 데다, 맛과 향이 너무 밋밋해진다"면서 "위스키나 코냑 등 도수가 높고 맛과 향이 풍부한 술이 얼려 마시기에 어울린다"고 했다. 류 원장은 "냉동실에 6시간 정도 놓아두면 얼린 술을 즐기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