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기까지
2008. 11.01.
밖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아내로부터
인정을 받는 남편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
아이를 낳고,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聖人)인 것이다.
- 최인호의《산중일기》중에서 -
1. 성인의 길
디 데이 전날 목걸이와 팔찌를 잃어 버렸다고 울상이 된 아내를 보며 내가 사 주겠다고 하면서 달랬다. 이것으로 액땜한 것이다. 아내라는 말을 처음으로 해 본다. 쑥스럽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리 표현해야 할 듯 하다. 결혼식이 흉이 없으면 재미 없을 듯 한 여유로움에 새 날이 밝았고 많은 사람들의 문자와 전화로 축하해 주었고 아침 일찍 울산에서 종찬이가 찾아왔다. 맑겠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나를 달래기 위해 비오면 잘 산다고 위로해 주었다. 예식장을 들어설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이란 두 남녀가 성인(成人)이 되었음을 뜻한다. 동시에 성인(聖人)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내가 성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아침에 "이제 너는 가장이 되었고 동시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한마디 말씀을 기리며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젊고 예뻤으며 여유롭게 나를 보며 웃어 주었다.
뒤늦게 결혼한다고 많은 친구들이 찾아 주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부터 대학동창, 복지관 식구들, 장애인 가족들, 한울방 식구들, 그동안 연락이 안 되던 고등학교 친구들, 심지어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도 인사차 왔다. 울산에서 대전에서 천안에서 용인에서 원주에서 경주에서 달려와 보잘 것 없는 장애인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이셨던 오정순 은사님의 주례사는 짧고 명확하고 또렷했다. 내가 봐도 여자분이 주례를 서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지만 은사님은 호랑이의 신랑과 소의 신부를 예를 들어가며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하신다. 신부도 울고, 장모님도 울고, 우리 가족도 울고, 친구들도 울고, 모두들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만큼 내 결혼이 가족에게, 친구에게 크나큰 경사였다.
폐백을 마치기가 무섭게 인사만 하고 우리는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신랑측과 신부측에게 뒤풀이 할 비용을 주고 같이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서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항에서 해결해야 했고 곧 이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변심없이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것, 죽는 날까지 사랑하되 하루하루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정과 사랑을 지켜 가는 길이며 성인의 길이다.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 곳이 진정 서로 윈-윈 하는 좋은 세상이다. 또하나의 행복을 기리기 위해 또다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이 곳에서 맹세를 한다. 이 사람을 하나의 양초가 되어 불 밝히리라. 나 하나만을 의지한 채 따라 온 이 신부를 위해 내 힘껏 사랑하고 아끼겠노라 하고 다짐을 하며 호텔에서 나와 무조건 택시를 탔다. 황 돔과 백세주에 의해 우리의 첫날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2. 이색의 아름다움
아침에 일어나니 바닷가가 아니었다. 계약이 틀린 것이다. 프론트에 항의하고 방을 옮겼다. 우리가 패키지로 온 줄 알았나 보다. 아침을 먹고 랜트카에 몸을 실었다. 친절한 기사에 우리는 제주의 비경과 아름다움을 맛 볼 수 있었다. 젊은 가이드는 우리에게 편안하게 안락을 선사해 주었다. 우선 찾아간 곳이 7만여 평이 넘는 한림공원이었다. 수많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묘미를 뽐내며 우리를 맞이했다. 넓은 공원은 깨끗하고 아담하고 소박해 보였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가이드에 우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휠체어에 몸을 실은 나는 그저 감탄사만 연발해야 했다. 70년만에 꽃을 피운다는 용설란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가이드의 안내로 맛있는 해물전골과 따 돔을 먹고 우리는 영화에서 나오는 쉬리언덕에 올라 바다를 배경으로 또 한 번 포즈를 잡았다. 바다를 언덕에서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가이드는 참 친절하다. 제주에서 자라 40여 년을 넘게 살아온 베테랑 답게 제주도의 숨은 이야기를 해 준다. 제주도는 결혼을 3일 동안 한다고 한다. 남자를 왕발이라 부르는 것은 그처럼 가부장적이고 남자를 위한다는 것이다. 56만의 인구 중에 여자가 5000명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주도는 정말로 돌이 많으며 논 농사가 별로 없다. 그만큼 땅이 척박하다는 뜻이다. 어디를 가도 바다와 가깝고 평화롭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 제주도이다.
약천사에 들러 작년에 보았던 오토바이 쇼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말고기를 먹었다. 이 때 아니면 먹기 힘들 듯 하여 먹으니 쇠고기보다 연하고 단백하다. 제주도는 관광도시 답게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지천이다. 좀 비싸기는 하지만 횟감이 즐비하다. 비록 반찬은 입에 안 맞으나 회 만큼은 싱싱하고 감칠맛이 난다. 호텔에 들어 오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아내는 기침이 심하다. 감기가 든 모양이다. 이틀간의 누적된 피로와 함께 일찍 잠을 청해야 했다.
3. 5년 후를 기약하며
아침을 먹고 바다를 바라보니 참으로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해 바다와는 다르게 푸르고 아름다웠다. 짐을 꾸리며 우리 다음에 다시 오자고 했다. 어제의 기침을 많이 걱정했으나 씻은 듯이 나은 기분이 된 아내의 눈가에서 흡족해 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기분이 들떠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간 곳이 민속마을이다. 작년에 왔었지만 제주도는 대문부터 특이하다. 설명해 주시는 분의 안내에 따라 돼지부터 말, 그리고 풍습을 보니 이국적이다. 말과 하루방을 배경으로 찰칵.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김영갑 갤러리이다. 폐교를 얻어 낸 그 곳에는 제주도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3년 전인 48살에 타계한 김영갑선생은 비록 고향은 아니어도 제주도를 위해 삶과 영혼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루게릭 병을 앓아 오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그 분이 쓴 글과 사진집『그 섬에 내가 있었네』한 권을 샀다. 아내가 잘 왔다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좋아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이 기분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단아하고 평화롭다. 해녀도 볼 수 있었고 검정 바위와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이 삼위일체가 되어 수를 놓는다. 해녀가 직접 끓여 주는 전복죽의 참 맛에 또 한 번 놀랍다. 전복과 소라와 함께 점심을 먹으니 무엇이 부러우랴 성산일출봉을 뒤로 가이드는 카메라를 들이댔다. 친절한 가이드는 이 곳 저 곳 모두를 설명해 준다. 우도에 관한 이야기, 발전소에 관한 이야기, 제주 방언의 특색 등을 들으며 우리는 금새 다른 곳으로 안내 되었다.
드라마에서 배용준이 주인공으로 나온 태왕사신기의 촬영지이다. 드라마를 재미 있게 봐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수백억이 들었을 듯한 이 곳은 일본인의 관광객이 많다. 한 시간 반을 구경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긴 곳이 나무꾼과 선녀라는 이색 간판을 한 곳이다. 이 곳은 70~80년대를 그린 옛날 그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추억의 공간과 시간이었다. 아코디온에 맞춰 아내가 노래 한 곡을 하니 박수갈채가 나온다. 시간이 부족하여 폭포나 미천굴 등은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 곳이 진정 서로 돕는 좋은 세상이다. 양초 하나가 수천개의 촛불을 밝힌다. 그 촛불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에게 깊은 인상에 남게 한 가이드는 혼자 차지하지 않고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의 즐거움의 미각을 선사해준다. 선물을 사고, 저녁을 갈치회와 갈치구이로 해결하고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서울 인사동 근처에 여장을 풀었다. 공기부터 달랐다.
4. 내가 가야 할 길
2000원짜리 해장국이 정말 맛있다. 주인에게 물어 보니 봉사의 마음으로 한단다. 혼자 움켜쥐지 않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인사동의 여러 갤러리를 들러서 천상병 시인 가족이 운영하는 귀천에 들러 모과차를 마시면서 그들의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내 가슴에 오래 남을 것이다. 책 몇 권과 여러 소품을 샀다. 인사동은 차분함을 가져다 주었다.
공항에서 만난 택시 기사를 불러 처음으로 간 곳이 조계사였다. 그 곳에서 합장 삼배를 올렸다. 우리의 결혼과 앞날의 행복, 그리고 건강을 기원하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용산에 있는 국립박물관이다. 하루종일 봐도 다 못 볼 작품들이 너무나 많다.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무교동에 있는 낙지집에 들러서 청계천을 돌아 경복궁으로 창덕궁으로 도니 하루가 다 갔다. 경복궁은 쉬는 날이고 창덕궁은 시간이 늦어 안으로 들어가 사진만 찍고 나왔다. 택시 기사도 친절하다 역시 우리는 복이 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데 가이드까지 힘을 보탠다.
처가에 들러 인사 드리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장모님께서 싸 주신 이바지 음식을 가지고 집에 왔다. 주무시는 부친을 깨워 한복을 입고 절을 올리고 음식과 함께 술을 올리니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다. 3박4일의 여정이 모두 끝났다. 나 하나의 촛불을 태워 수천 개의 양초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난 기어이 그 길을 택하리라.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시집온 아내에게 딸을 주신 장모님에게 감사 드린다. 어른됨을 축하 격려해 주시고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잘 살겠다는 인사와 함께 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