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수호할머니댁과 어촌박물관

역려과객 2026. 6. 21. 15:59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니 말이다. 엊그제 한 이야기도 생각이 안 날 때가 많다.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나 처에게 묻곤 한다. 단어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가령 장기 급수도 4~5년전엔 2~3급이었는데, 지금은 9~11급을 왔다갔다 한다. 5년전에 뇌출혈을 앓고 난 이후로 밥을 많이 흘리기도 하고 화장실에서도 자주 넘어진다. 갈수록 더 할 것인데, 걱정해서도 안 되지만 숙명이려니 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 박물관을 다녀왔다. 내 기억으론 다녀온 것으로 기억되는데, 건물을 보니 아닌 것도 하여 집에 와서 티스토리를 찾아봤다. 그런데 187월에 동서와 처제와 함께 다녀온 것으로 되어있다. 건물색이 바뀌어있는 것을 몰랐다. 티스토리의 내용과 사진은 어제 본 것과 일치했다.

 

 

장애인 친구들과 한울방이라는 음악방송을 만들어서 말없이 신청곡만 받아서 매일 밤 10시부터 두 시간 활동을 했었다. 그 친구들과 우연히 수호할머니댁에 갔었는데 그 이후부터 20년간 대부도에 가면 들리곤 했다. 동서부부와 우리부부 그리고 길호까지 다섯명이 갈 때가 많았는데 처제가 떠난 후에 한 번도 안 갔었다.

 

 

                                          2018년 7월

 

 

한울방은 내가 결혼하면서 자연히 없어지고 가끔 만나 술 한 잔 했었는데 지금은 서로 바빠 대호 부부랑 식사하는 것이 다이다. 지난 1월에 인숙이가 시간을 낼 테니 만나자고 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전화를 해서 처를 포함하여 8명이 만나서 점심을 함께 했는데 모두들 바쁜지 연락이 뜸하다.

 

                               2026년 6월

 

모친은 고잔 당골에서 태어나셨다. 바닷가가 10분만 걸으면 되었고, 기차와 협궤열차가 외가 사랑방 툇마루에서 훤히 보였다. 다섯째 이모의 결혼식에 협궤열차를 타고 송도에 간 적이 있다. 외조부께서는 겨울방학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연시를 꺼내 주셨다. 그것이 60년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그만큼 첫 손자가 예쁜데 말을 잘 못하니 얼마나 가여울 것인가를 생각하매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 시절의 외조부가 그립기만 하다.

 

 

 

바다가 가까우니 모친은 물질도 잘하셨다. 내가 어릴 때 모친은 다라이를 머리 위에 이고, 버스를 타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게와 맛조개 등을 잡으러 고잔 앞바다에 다녀 오시곤 했었다. 모친은 손놀림도 빨라 7~8명이 잡은 것보다 더 많이 잡아 오셔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셨다.

 

 

타임뱅크 네 번쩨 수업이 24일에 시작되었다. 비누를 만들었는데 똥손인 내가 따라기는 것도 벅차다. 원장님의 도움으로 만들며 모두들 웃어가매, 열등생도 덩달아 웃는다. 원장님께서 토요일에 수호할머니댁에 가자고 하셨다. 수호할머니? 많이 들었다 내가 “10년 단골이라고 말하니 같이 가자고 하셔서 내가 같이 가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58년 개띠라니까 구하은 강사님께서 한 술 더뜬다. 자기 할머니가 개띠라며 나보고 할아버지라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20일 토요일에 비가 많이 내렸다. 정확히 1030분에 목사님께서 큰 차를 끌고 오셨다. 완오님이 조수석에 탔고, 뒤에는 한 아주머니께서 전동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나중에야 완오님의 모친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부부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는데 뒤에서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처가 자꾸 뒤를 본다. 아주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었나 보다. 처가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하면서 뒤로 가서 아주머니를 일으키려는데 힘이 부족하다.

 

 

 

목사님께서 급히 차를 세우고 같이 일으키며 처가 사간 비타 500 한 병을 권했다. 모친은 당뇨환자이셨고, 인슐린을 맞고 계셨는데 저혈당 쇼크가 온 것이다. 내 모친도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셨고, 나도 14년이 되었으며, 처도 8년째 들어간다. 내가 다니는 고대병원에 가면 당뇨환자가 가장 많다.

 

 

 

비가 안 오면 얼마나 좋을까? 주차장에 원장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맞이한다. 비 오는 날 넘어져서 두 번씩 부러진 왼쪽 쇄골이 아파 지난 월요일에도 주사를 세 대나 맞았다. 클러치를 짚는 이는 비가 오는 날은 될 수 있으면 나가지 않으려 한다. 단체미팅은 재작년 평창에 다녀온 이후로 잘 안 나간다. 원장님은 타고난 천사가 맞지 않을까 싶다.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휠체어를 밀며 수호할머니댁 칼국수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인 여사장님과 처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내 옆에 오셔서 건강해졌다고 하며 반기신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낙지 한 마리씩 넣어주시고 음료수도 서비스로 주셨다. 칼국수와 파전을 먹고 나서 원장님은 어촌박물관에 가자고 하셨다. ’어촌박물관? 우리가 갔던 곳인데나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서 따라갔다.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비도 오고 계단도 있고 해서 차 안에 있었다. 처는 내가 안 가니 차 안에 있겠다고 한다. 완오 모친과 셋만 남았다.

 

 

 

어떤 처지나 관계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진심, 양심. 초심이라고 했다. 완오 모친은 나이를 밝히며 처에게 언니!”라 하면서 초면인데도 살갑게 처와 이야기하신다. 나는 그렇게 못 하는데 그런 것이 부럽기만 하다. 커피를 마시고 차가 떠날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가 봐도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촌민속박물관에 들어서니 옛모습이 달라져 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원장님을 따라 전시관을 돌았다. 박물관은 2층까지 있는데, 1층에는 1전시실이 있고 2층에는 2전시실과 3전시실이 있다. 2층에 오니 우리가 한 번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87월은 더워서 더위도 식힐겸 2층 영화관으로 들어가서 영화 타잔을 봤었다. 어촌민속박물관은 그때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또 쓸 필요가 없다. 다만 방 식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기를 원장님은 바라셨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찍기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처는 어느새 용주님과도 진석님과도 웃으며 말을 한다. 어떻게 그리 말을 잘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전시관을 다 돌고 원장님은 우리에게 숙제를 주셨다. 그림을 그리라는데 재주가 젬병인 나는 사진찍기에 바빴다. 단체사진을 찍고 나서 좌담회를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많은 박물관을 가 보았다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좌담회를 끝으로 퇴근길에 올랐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퇴근길이 더 재미있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올 때와는 딴 판이다. 완호 모친도 건강해 보였고 더욱이 목사님의 입담이 우리를 놀라고 했고, 감동시켰다.

 

 

예쁜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베품은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신다. 선감도의 이야기부터 고운동산 펜션 등 일제 시절부터 80년대까지를 설명하신다. 가슴 아픈 사연에 우리는 감동있게 그러나 치를 떨며 들었다. 목사님은 위트있게 잘하신다. 목사님과 처와의 이야기는 집에 올 때까지 이어져 나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모습과 생명체를 품은 우주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공간속에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이다. 비록 체험은 아니지만 대부도의 삶 속에서 그리고 목사님의 가르침 속에서 소중하고 귀한 존재를 보았다. 종교는 달라도 삶을 영위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두 분 부부에게 감사드리며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더 가낍게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고 특히 완호 어머니께서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린다.

 

 

 

 

 

2026621

 

새로운 친구들과 여행의 맛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