忍一時之憤 免百日之憂 인일시지분이면 면백일지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한다. 고등학교 때 책에서 본 글이다. 늘 이 글을 되 새기곤 한다.
두 주일을 잠을 못 잤다. 분하고 억울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래도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내가 움직일때는 자원봉사를 하고 살았고, 움직이지 못할 때는 비록 얼마 안 되지만 십수년을 여러 곳에 후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일은 처와 코드가 같았다. 작년 시흥복지관에서 10년 이상 후원했다고 후원증서를 전해왔다.
이렇게 평생토록 살아왔는데 보름 전부터 가슴에 불기둥이 치솟는다. 가슴에 응어리가 깊어 솟아날 방도를 찾기가 힘들다. 처에게 돈만 밝히는 늙은 여우라 하고 내게는 나를 철부지라 하고 세금도 못 내겠다고 하며 악담을 한다. 내가 욕한 그 한마디가 몇 천만원이란 말인가? 처는 그 소리를 듣고 이틀 동안 펑펑 울더니 그래도 가족인데 소송해서 이긴들 당신이나 나나 편할 것이 없지 안느냐며 내 건강이 최우선이라며 나를 진정시키며 달랬다. 나는 누구를 미워한 적은 있었지만 싫어하거나 원망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더니 가면 갈수록 분해한다. 수많은 생각을 했는지 이대로 못 참겠다고 한다. 늙은 여우라는 낙인이 찍혀서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는다. 나야 늘 당해 왔지만 처가 이렇게 우는 꼴을 차마 못 보겠다. 그래서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해”라고 하니까? 자기 지인이 아는 곳이 있다고 하며 여러 군데를 알아보겠다고 한다. 나는 억울함도 풀어 주어야 하지만 이다음에 부모님을 어찌 봐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자료를 찾아보려고 2000년 이후의 일기장을 찾았다. 2002년 가을이다. 집터는 경매에 넘어가는데 나는 페인트가게가 망하면서 삶을 정리해야 했고 농약을 갖다 놓고 글을 쓰는데 부모님이 내 방으로 건너왔다. 셋은 통곡을 했고 그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그 이후로 모친이 당뇨가 걸려 그때부터 모친 간병에 힘을 써야 했다. 모친이 살아 계셨을 때 모친께서 앞 밭은 당신 몫 논은 내 몫 밭은 삼남매 몫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다 지난 까마득한 이야기다. 2004년 9월 부친이 동생들 보고 싶다고 하여 내가 힘들다고 동생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둘째가 추석날 내게 10만원을 주면서 힘내라고 용기를 준다. 그 이후부터 나사를 끼는 알바를 했다. 남들은 놀면서 하루에 2만원 벌이를 하는데 나는 밤 10시까지 작업을 하는데도 한 달에 30만을 벌었다. 모친께 모두 드리니 내게 고생했다며 10만원을 주신다. 모친 상을 치르고 집에서 정리하고 난 후 부친께서 밭에 갔다 오시더니 큰 호박 13개를 도둑 맞았다고 화를 내신다. 양심도 없는 넘들
2006년부터 장애인 복지관에 다니며 1년을 탁구를 배웠으나 한 달 배우 다른이에게도 상대가 안되는, 그저 인원수 챙기는데 만족해야 했다. 음방가족들을 만나 인숙이 대호 진범 석열등과 술 마신 이야기 윤봉이와 술 마시며 나눈 이야기 등 파란 만장하다. 희노애락이 50년 역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사고난 후 여동생이 내 일기를 보고 연장선에서 일주일간의 일기를 쓴 것도 보았다. 말로는 소통이 안 되지만 수많은 일기장 속에 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나는 나 나름대로 법무사로 전화를 했다. 대충 이야기하니까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하며 사기와 공금횡령으로 할 수 있고 변호사법 어쩌구저쩌구 한다. 해서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끊었다. 아무리 밉지만 이것은 아니라고 판단을 하고 처가 하고픈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동생이 처를 왜 미워했는지 알 듯 하다. 2014년에 막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처에게 말을 했나보다. 그래서 집을 담보로 하는 대신 처에게 아파트를 넘겨버렸다. 그것을 여동생이 나중에 알았고 그때부터 미워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3년전 추석때였다. 처는 갑상선을 앓았고 거의 완치될 무렵 유방에 혹이 있다고 하여 모친 기고일을 며칠 뒤에 검사하자는 것이다. 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모친 제사를 지내지 말고 부친과 같이 지내겠다고 하니까 동생들이 반대를 해서 그 해는 모친 제사를 안 지냈다. 모친이 나를 사랑해지만 내 처가 먼저였다. 처가 병에 걸리면 나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그런데 여동생은 나를 꾀여 안 지내겠다고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 같았다. 처는 차례와 기고 모두 반긴다. 내가 동생들 보는 것을 알고 좋아하고 음식 같이 나누어 먹고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암튼 처가 잘 못들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친은 나를 결혼시켜야겠다고 하며 3000만원 줄테니 캄보디아 여자와 결혼을 재촉했다. 여성에게 주어야 할 돈이 그러니 안 보아도 돈이 얼마나 많이 들 것인지 뻔히 알 것이고, 또한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내가 가르쳐야 하고 아무튼 싫었다. 그래서 안 하겠다고 하니까 다음에 3000많원 빚이 있는데 갚아줄게 하라고 해서 싫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셨다. 만일에 그래서 결혼한 들 편할 리가 없었고 홧병에 오래 가지 않으리라 생각을 했다. 어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더니 처를 보고 나니 얼마나 좋아하셨는지를 짐작이 갔다. 그리고는 논을 내 앞으로 해 주신 것이다.
만일에 결혼을 안 했으면 관리를 못해서 저세상 사람이 되었거나 병마와 싸우거나 했을 것이다. 설사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착한 사람이 내게 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잘 살아왔다. 부친은 막내를 제일 좋아했고 백서방을 제일 미워했다. 모친은 나를 제일 안쓰럽게 생각했고 여동생을 제일 미워했다. 내가 결혼하면서 부친은 처에게 늘 고마워 하고 예뻐해 주셨다.그렇게 짝사랑했던 모친의 제사를 안 지내겠다고 하니 동생들이 처를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오해 아닌 오해를 한 것이다.
지난 토요일 밤에 흉측한 꿈을 꾸었다. 매번 따돌림 당하는 꿈을 꾸는데 요즈음은 그나마도 잘 꾸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처와 안산에 갔는데 삼거리 앞에서 처는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었고 여동생이 대형 트럭을 타고 오다가 처를 보고 급히 좌회전을 틀더니 처를 갈아 엎었고 나는 여보!!!!! 아아악!!! 하며 비명을 질렀다. 처가 왜 그래? 하며 깨운다. 그 소리에 여보? 살았어? 하며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잠을 못잤다. 이런 꿈은 평생 처음이라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 마음대로 해 라고 한 것이다.
그 전에 동생들과 의논하고 싶어 만나기로 혼자 생각했다. 이런 일로 인천의 둘째를 부르기도 무엇하고 해서 일요일에 막내만을 불렀는데 막내는 안 오고 제수씨만 왔다. 안양 유원지에서 점심을 같이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제수씨도 여동생을 왜 미워했는지 왜 돈을 안 주겠다고 하는지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흥신소에 맡기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밝아졌다.
이튿날이 대체공휴일이다. 광호가 네시에 오겠다고 한다. 동서에게 상의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동서는 안 오고 처제와 조카들이 왔다. 소래포구에서 생선회를 사 주겠다고 한다. 소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코로나 시국인데 이 곳은 별천지이다. 처가 처제에게 말을 꺼냈는데 하지 말란다. 처제는 언니 보다 우리 가족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차 안에서 처는 길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나라에게 기부했다고 생각하라며 좋은 끝은 있다며 이모를 안심시킨다. 돈은 물과 같다며 흐르는 물은 고여 있지 않다며 가져 갈 수도 없다고 한다. 모든 걸 잊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분위기를 바꿔 새 옷 하나 사 입으라는 도인 같은 이야기를 한다. 분하고 억울하다니까 세월이 흐르면 잊혀진다고 이모를 편하게 해 준다. 그러더니 웃음기를 보이며 그러겠노라 하며 화답한다. 그러고 보니 처는 결혼전에 옷 장사를 해서 인지 자기 돈으로 10만원 짜리 옷하나 사 입은 적이 없다. 내가 괜시리 미안해진다. 조카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도 깊은 숨을 내 쉬었다. 이제야 부모님을 볼 수 있겠다. 처는 어디를 가도 칭찬을 받는다. 아파트에서 동네에서 병원에서 가는 곳마다 천사라 부른다. 절약과는 거리가 멀지만 모든 사람을 도와주고 싶고 나와 같이 여행가고 싶어한다. 술을 좋아했는데 이젠 체력이 안 따라 주나 보다. 이 기회에 30년 만에 아들 만나러 가겠다는 것을 내게 허락을 얻어내고 좋아한다.
우리는 전에 주일마다 물왕저수지에 갔었다. 지금은 힘이 벅차 2~3주에 한 번 가는데 지지난 주에도 다녀왔다. 햇빛을 봐야 골다공증이 안 걸린단다, 처는 보통사람 같지가 않아 드라마를 보지 않고 건강프로그램을 본다, 길 카폐에서 커피를 시켜 먹으려는데 자리가 없어 40대로 보이는 두 부부에게 한쪽만 양보를 부탁했더니 그러라고 한다. 다 마시고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부인이 한마디를 건넨다. “정말 너무 보기 좋아요” 하면서 남편이 물어 본단다 “당신도 저 분처럼 이다음에 저렇게 할 수 있느냐”면서 아름답고 행복해 보여서 좋다고 한다. 듣기 좋은 말이다. 처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리라. 이제 처도 나도 서서히 안정되어 가지만 여동생은 다시 안 보고 싶다. 모든 것을 내려 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불기둥도 사라졌다. 해프닝 같지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보름 그리고 이틀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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