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전 월요일 의사를 만나고 왔다. 머리 아픈 곳은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약을 좀더 나은 것으로 주겠다고 한다. 그 약을 어제부터 먹었더니 덜 아프고 견딜만 하다. 처와 내가 간곡히 의사에게 이야기했더니 의사는 자기를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CT와 MRI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상해라며 양심상 허위를 기재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자기를 이해해 달라고 우리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막내제수씨가 기사역할을 했고, 우리는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그리고 처와 제수씨가 약속을 했나보다. 시간되면 내일 영흥도에 가서 점심먹고 오자고 한 것이다.
이튿날 비가 적잖히 온다. 10시에 막내네가 도착하였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영흥도의 맛집으로 가기로 했다. 내가 한마디 했다. 웬지 모르게 오늘이 가족끼리 마지막 여행일 듯하다고 순간 분위기가 싸해진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 약을 먹고 왔는데도 머리는 여전히 아프다.
처와 결혼한지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초창기에 처는 안 좋은 내가 듣기에도 안 좋은 소문이 파다하게 많이 돌았다. 날라리라는 둥 애가 다섯명이라는 둥 얼마 살지 못하고 도망갈 것이라는 둥 좋은 옷만 사입고 다닌다는 둥 내가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둥 해괴한 소식이 예서제서 많이 들려왔다. 아무리 내가 천치 바보일지라도 난 안 믿었고 오히려 처를 감쌌다. 그럴수록에 나는 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고 열렬히 사랑했다.
가까운 형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고 오래 못살 것 이라고 확신을 했다. 모친이 살아계섰더라면 아마 업고 다녔을 것이다. 처는 나와 결혼해서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그럴때마다 신씨집안은 어느 하나 찾아와서 위로해 준 적이 없다. 많이 서운했지만 그것이 가족이 되어 가는 것이라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처는 나를 수차례 살려냈다. 그럴때마다 나를 간호하고 간병해 주었다. 항상 따뜻하고 긍정적인 한마디에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주위에서는 모두 긍정적인 마음씨에 칭송이 자자한데 유독 우리집안에서는 작은어머니와 고모님이외엔 그언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나를 아는 모든 이는 아니 설사 모르는 이도 나와 몇 마디를 나누면 내가 부족하거나 모자라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아는 이에게 많은 짐이 되곤했다.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태웠을 것이고 동생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수많은 죽음과 싸웠다. 92년도에 깨어나지 말아야 했는데 결국애는 살아났다.
내가 스로로도 답답하다는 것도 잘 안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누구인들 나랑 살려고 하겠는가? 웬만한 사람은 단 사흘도 못 살 것 이라는 것은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회초리를 들면서까지 내가 잘되기를 바랬다. 결국에 당신 잘못이라고 얼굴을 못들고 다니셨지만...
그런 점에서 어머니와 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기를 안 죽이려고 예쁜 옷에 먹을 것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쩌다 다투면 한시간도 안되어 자기가 잘못했노라 하고 빌며 화해를 청하곤 했다. 21세기에 이런 여자를 어디에서 만날까? 두 분에게 늘 죄송스럽고 할 말이 없다. 모친은 당신이 낳으셔서 그렇다고 하지만 처는 내 비위를 다 맞추며 일구월심 내가 건강하기만을 기도한다. 과연 사랑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처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겠다고 한다. 이세상에 환생이 있다면 말 잘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생에 못다한 것을 처를 모든 것을 다 바치리라 다짐해본다.
어느 가정에서나 대부분 재산 가지고 다툰다. 우리집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도 감히 말하지만 내가 두 가지 잘한 일이 있다면 처와의 결혼 그리고 처앞으로 아파트를 넘겨준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설사 잘못되어 죽더라도 형제간에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처는 그런 점에 현명하다. 내가 죽는 날까지 찰 처리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모친 유언대로 나도 따라 가련다. 모친이 여동생을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나 또한 언제 죽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안 불렀으면 한다. 처는 매일 아침 용기를 북돋으며 파이팅을 외치지만 전처럼 자신감이 떨어진다. 처는 초지일관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최근 4개월에 병원비만 거의 천만원이 깨졌다. 아마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만 먹고 살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어쩌다 좋은 어마니와 좋은 처를 만나 등 따시고 배곯지 않고 살아왔는데 오랜 투병 끝에 짐만 된다고 생각하니 특히 처에게 미안하고 가엾고 안타까울 뿐이다. 먼 훗날이 될지 모르겠으나 내가 죽으면 해운이라는 수계명에 따라 바다에 뿌려 주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가져본다.
조상님 그리고 어머님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내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 도재열씨
당신은 내게 최고였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고마워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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