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3대를 함께 만나다

역려과객 2023. 9. 19. 15:23

 

 

평산신씨 사간공파 34세손인 조부님께서는 1903년생이다. 슬하에 장남이신 선친 이하 일곱 명을 두셨지만 다 돌아가시고 셋째고모와 막내고모 두 분만 계시다. 가까이에 사시는 작은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찾아 뵙는데 인천 작은 어머니와 고모님과 고모부님들은 찾아 뵙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번 사촌 동생의 아들 결혼식에 경주고모부님만 못 뵙고 웃어른 다섯분 모두 뵐 수 있었다. 조부님 살아 계실 때는 우리집은 늘 북적되곤 했었다. 선친이 7남매의 장남, 모친이 8남매의 장녀인지라 큰 행사가 많았었다. 지금도 어른 중에 고모는 경주고모와 이모는 화성이모와는 매일 카톡을 한다.

 

 

 

이번 결혼식에 36세손인 우리 사촌 10명인데 광수만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9명이 참석했다. 10명은 모두 결혼하여 자식 한 두명 있지만 정작 나는 자식이 없다. 그런 면에서 부모님께 죄를 지은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했다. 조부님은 어린 장손을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갖은 병마와 사고로 인해 모든 이에게 짐 아닌 짐이 되고 말았다. 작년 8월 둘째네 아들인 재현이 결혼식에 처가 코로나로 인해 장손의 결혼식에 참석을 못해 못내 아쉽고 둘째네에게 미안한 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남보다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갔다. 배움이 좋았고 지식을 쌓는 것이 좋았지만 약하다는 것으로 모든 이에게 지금으로 치자면 늘 왕따를 당했다. 그래도 학교 가는 것이 좋았다. 내가 두각을 나타난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선친의 도움으로 특별상을 받고 상품으로 공책을 받았는데 공책을 흘려 전교생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통지표에 기록된 것에 잘 운다. 계산은 정확하나 속도가 느리다라고 적혀 있었다. 학교 대표로 안양에 주산대회에 나가고 5년 연속 개근상과 처음으로 우등상을 타기도 했었다

 

 

 

나도 결혼할 기회가 있었다. 제일화학에 다닐 때 여러 번 맞선이 들어왔다. 그때 셋째, 둘째, 막내가 일년에 한 명씩 결혼을 했다. 90년도엔 막내가 결혼하고 곧이어 선친 회갑을 치루었다, 그해 여름 휴가때 충주 여자친구 집에 찾아갔는데 6급 장애인인 여자친구는 가을에 결혼하자는 것이었다. 한 해에 세 번 큰일을 치를 수 없다고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더니 자기에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줄 알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헤어지고 말았다.

 

 

 

이번 혼주인 명숙은 나와 이름이 비슷하다. ㄱ자 하나 더 있다. 매부와 문수, 제수씨는 물론 명희 그리고 작은어머니께서도 정말 반기신다. 매부는 결혼 초기부터 지금까지 개인택시를 한다. 문수는 딸 아들 모두 결혼했다.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벌써 손자까지 얻었다. 그런 면에서 문수가 가장 큰 어른이 아닐까 싶다. 명희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매우 쾌활하다. 지난겨울보다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사거리 작은댁도 광수를 대신해 제수씨가 인사를 한다. 재민이도 12월에 이곳에서 결혼을 한다고 한다. 축하할 일이 너무도 많다. 사거리 작은어머니께서도 참석을 하셨다. 동수, 영미부부, 미연이까지 모두 참석을 했다.

 

 

 

정작 보고 싶었던 우리 제수씨들은 참석을 못했다. 4년만에 여동생을 봤지만 서로 본체만체 했다. 조부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놈들하고 혼내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제와서 굳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장자인 내 잘못이요 이것도 내 업보인 것을. 장자 역할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금도 아무것도 못하고 병마와 싸울 뿐이다. 지난달 말에도 마취통증과에서 허리 시술을 받고, 이번 달에도 왼쪽 팔에 연골을 맞았다. 약이 독해 오전에는 늘 약에 취해 잠을 잔다. 장손으로 장자로 할 말이 없다.

 

 

 

돌고 돌아 경주 고모와 천안고모부 내외분을 뵈었다. 경주고모는 일어나 내 곁으로 와서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봉투를 주신다. 내게는 건강해라고 하시고 처에게는 애쓴다하며 위로를 해 주신다. 고모와 처는 가끔 전화를 하는가 보다. 고모님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가족 모두에게 또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반가웠다. 70년 중1때 경주고모와 천안고모와 4개월동안 안양 북부동에서 자취를 했었다. 경주고모도 직장을 다니셨고 막내고모도 유유산업을 다닐 때였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는지 경주고모가 잉크 이야기를 하셨다. 볼펜이 없던 시절이었다. 잉크병이 깨져 잉크를 빨아먹은 스폰지를 어리석게 교복 주머니에 넣고 왔더니 교복 속이 잉크색으로 변한 것을 두고 경주고모가 가끔 나를 놀리곤 하셨다. 막내고모는 기분 좋으면 나를 먼추라고 부르신다. 하긴 선친도 기분이 좋으시면 나를 언주라고 부르셨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막내가 우리를 태워 오갔다. 막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모처럼 모든 것을 지우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만남의 희열을 느낀 하루였다. 만남은 웃음과 희망 그리고 연민을 느끼게 한다. 37세 신씨가 아홉명이다. 이제 점점 줄어들겠지. 먼 훗날 조카, 당질을 다 기억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기억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50년을 넘게 써 온 일기장만이 흔적을 남기게 되리라. 오전에 사촌동생에게 아픈데도 찾아 주어서 고맙다고 전화가 왔다. 이것이 핏줄인가? 하고 울컥했다. 나만 뒤처진 망상에 헤매이고 있었나 보다.

 

 

 

다음주와 다다음주에 가족을 또 볼 수 있겠다. 한가위와 모친 기고일이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아우들과 제수씨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이번에도 성묘는 못 갈 듯싶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처를 위해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2023919

가족과 친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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