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TV프로는 늘 인간극장이다. 인간극장에 나오는 사람은 평범한 시민이다. 주 5회 방영되는데 프로마다 감동을 준다. 지난주에는 고아 출신의 48세의 평범한 시민이 장학사가 되어 보육원을 돕고 기부하며 많은 김천시민의 표상이 되어 우리에게 훈훈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폭염과 함께 채소값이 금값이 되었다. 김칫거리와 갈비찜을 비롯하여 추석에 차린 차례상 차리는데 근 50만원이 든 사상 최대의 돈이 들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데 비단 우리집만이 아닐 것이다. 살기가 점점 더 힘이 드는 것 같다. 지난 오월에 화초를 손질해서 처가 휑하다고 많이 울었는데 불과 넉 달 만에 전과 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자연은 변함없이 흘러가는데 인간만이 늙어간다고 탓을 한다.
추석날 준호를 제외한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차례를 지내고 2년만에 성묘에 다녀왔다. 뇌졸중 등 여러 병으로 2년간을 못 뵈었으니 얼마나 뵙고 싶은지 꿈에서도 조상님을 만났으니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준 셈이다. 차에서 내려 산소까지 약 5~60m 거리이다. 성인으로 빨리 기면 30초 거리인데 나는 가는데 만 5분이 넘게 걸린다. 그것도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땀이 범벅이 되고 땀방울이 눈을 가려도 좋았다. 처야 고생이 되든 말든 조상을 뵙는 것에 만족했다. 내 이기적인 생각이겠으나 그 순간만은 정말 좋았다. 이번에 안 올라가면 언제 또 갈지 장담할 수 없다.
이튿날 장모님을 보내드리고 처음으로 처가에 갔다. 항상 장모님께서 반겨 주셨는데 안 계시니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 음력 8월 17일은 인천 작은아버지의 생신이라 늘 인천에 갔었다. 작은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내가 결혼한 후 처가에 갔는데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을 느꼈다. 광호가 사 온 화이트 샴폐인에 막내가 선물한 레드 샴페인이 어울려 촛불을 끄고 식사를 한 다음 고스톱을 치고 저녁으로 비빔국수까지 얻어먹고 동서와 같이 집으로 왔다.
바둑을 네 판두고 동서는 돌아갔다. 잠이 들기 전에 내 속마음을 처에게 말했는데 내 뜻대로 하라고 한다. 늘 그랬듯이 처가에 가면 칙사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온 가족이 나를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장모님께서 가장 많이 사랑하셨던 것을 이제야 느끼게 된다. 당신의 큰딸과 잘 살아준 고마움의 표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장모님 사랑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작년에 당질들 결혼식에서 집안 어르신을 뵙고 올 2월에는 인천 작은어머니를 뵙고 5월에는 경주 고모부 내외를 뵙고 천안 고모님댁은 전화만 드리고 선물만 보냈다. 사거리 작은집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찾아뵙는다. 지지난 주에도 찾아갔는데 무척 좋아하신다. 그런데 외가 쪽으로는 외삼촌도 전화를 안 받고 화성 이모만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여쭐 뿐 모든 것이 끊어진 상태이다.
20여년 전에 막내처제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토요일에 평택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하여 처만 참석을 하고 광호네 집에 갔다가 새벽 1시가 넘어 들어오더니 내 엉덩이와 종아라에 약을 발라 주고 모두 정리한 다음 술 한 잔 하고 서럽게 운다. 약 30분을 우는가 보다. 자신이 늙어가는 안타까움인지 장모님을 생각하는 것인지 저 세상으로 간 막내처제를 생각하는 것인지 하나뿐이 없는 동기간인 아픈 처제를 생각하는 것인지 연락이 끊긴 아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나를 캐어하는 것이 힘이 드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 오는 밤에 처량하고 스산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겠는가? 말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나나 처나 병원에 안 다니면 좋을텐데 늙으면 늙을수록 병이 더 깊어진다. 처도 허리가 아파 진통제로 산다. 지난 월요일 처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더니 먼저 씻고 매주 월요일과 같이 나를 씻긴다. 그리고 밥을 먹은 다음 대청소를 한다. 11시에 점심으로 김밥을 먹고, 희망네바퀴를 불렀다 30분만에 차가 왔다. 시진과 심전도를 하고 순환기내과에 가서 의사를 뵙고 약을 탄 다음 하모니콜을 불러 동네 정형외과에서 연골주사를 맞고 집에 오니 오후 4시가 넘었다.
그때부터 처는 마트에 가랴 음식 준비하랴 바쁘기만 한데 나는 야구만 봐야 했다. 모친 기고일엔 늘 재영이가 참석했는데 재영이가 바쁜 관계로 준호가 대신 참석을 했다. 둘째가 농사지은 배와 포도로 제사상에 올라갔다. 모친 기고일은 늘 풍요스럽다. 모친 돌아가실 연세에 처가 그 나이가 되었으니 힘도 들 것이다. 기진맥진하는 처를 모르는 척해야 했다. 앞으로 더 힘이 들 것이다. 가장의 무게가 여기서 느껴진다.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단 한 번 아니 1분만이라도 뵙고 십습니다. 훗날 찾아가 큰절을 올리며 사랑한다고 크게 외치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2024년 9월 25일
모친과 장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에
'해운의 일기 그리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난 내 마누라가 제일 좋다 (10) | 2024.10.16 |
---|---|
노인들의 삶과 건강 (6) | 2024.10.03 |
추석은 다가오는데 (10) | 2024.09.09 |
운이 좋은 짧은 여름휴가 (0) | 2024.08.24 |
폭염과 파리올림픽 (0) | 202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