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의 일기 그리고 ..

이천 도자기마을과 30년 지기

역려과객 2019. 3. 10. 15:31





 

영화를 보고 있는데 처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람 쐬러 가는데 같이 안 갈거냐고 한다. 세시가 넘었는데 다 늦게 어디 갈 곳이 마땅치가 않은데 오이도나 가겠지 하며 차를 기다렸다. 이천 도자기마을에 간다는 것이다.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했는데 내일은 비가 오고 6시도 밝다는 것이다. 여주는 몇 번 왔었는데 이천은 생소하다.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것은 알겠지만 음방에 있던 호수가 살던 곳으로 음방 식구들과 한 번 왔을 뿐이다. 도자기는 말로만 듣고 진품명품에서나 보는 것으로 알았던 내게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밥그릇부터 커피잔에 이르기까지 생활용품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임금께 진상하던 쌀의 고장 여주이천

인삼과 도자기로 돼지와 관광지로

이제사 찾아왔네라 농촌속의 도심을

 





 

막상 도착해보니 설봉공원이었다. 이천에는 돼지박물관부터 기독교역사박물관으로 해서 시립박물관 등 박물관이 참 많다. 주차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무료라서 좋다. 가을에 오면 분수대와 단풍들이 어우려져 보기가 더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해 보며 도자기 마을을 찾았다. 이천에는 도자기 마을도 많고, , 인삼 도자기 등 축제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안락한 농촌 속의 도심이었고 관광으로 인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공방도 많지만 5시가 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러 공방들이 있는데 우리는 다 돌지 못하고 도자기사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판매점을 들어갔다. 모든 것들이 보고 싶고 갖고 싶은 마음이 욕망을 일으킨다. 길호가 자기 엄마와 이모에게 한 가지씩 선뭃을 해 준다. 처와 처제는 신이 나고 나는 감상하고 사진찍고 머리에 담아두기에 바빴다. 처는 목걸이를 선사 받았다. 30분가량 관람한 다음 공원을 돌아 시립박물관에 갔다.

 





 

섬세함과 아름다움 빚나는 질그릇은

공방과 체험속에 한땀 한땀 정성 쏟아

고웁디 고운 얼굴로 탄생한 미의 극치

 



 

시립박물관은 중축을 하고 있었다. 6시까지인데 아마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 듯하다. 이천의 역사가 참으로 오래된 듯하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의 서회 등 인물은 물론 유적, 유물, 도자기 특히 교과서에 나오는 삼강청자부터 분청사기, 백자 등 많은 도자기의 보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일찍 왔으면 여러 곳의 공방을 들르고 체험도 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만족해야 했다. 뒤늦게까지 돌보아주신 관리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박물관을 나왔다. 그리고 대학동창인 현숙이네로 가자고 했다.

 





 

선사부터 현재까지 역사는 펼쳐지고

삼강청자 분청사기 환 획을 그었네라

이천의 시립박물관 날로 번창 하여라

 





 

82년말 교통사고를 당해 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3년만에 위험물취급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가축약품인 제일화학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가축에게 주사제약을 만들었는데 고졸과 전문대졸 대졸의 임금 차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책임자가 공장장이신 오상무님과 점심때마다 장기를 두었다. 상무님은 나를 잘 본 듯 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시골에서 대학을 갈 형편이 못되었는데 우리집 역시 고등학교도 부모님의 헌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뒤늦게 혼자라도 공부하고 싶었다. 우리집은 농사도 짓고 화초도 재배하고 소도 키웠다. 직장에선 가축약품을 만들기에 농업은 물론 화훼부터 가축 생리등을 알고 싶어 방송대 농학과를 지원하고 싶다고 말씀하니까 공장장님께서 혼쾌히 수락하며 졸업하면 모든 것을 인정해주겠다고 경력증명서까지 떼어 주셨다.

 





 

젊은 시절 고생들은 사서도 하겠지만

배움속의 욕망들은 한없이 드높았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미래의 언약이리

 





 

방송대는 경력증명서와 졸업장 성적증명서가 필요로 했다. 그래서 90학번으로 들어갔다. 3월에 안양에서 오리엔테이션 하는데 준철, 유미, 호섭, 기태, 영숙 등 우리과 친구들 십 수명이 모였다. 그중 막내인 듯한 꼬마 현숙이를 만났다. 우리는 열심히 하자며 과대표로 기태를 뽑고 매주 토요일에 만났다, 주중에는 잔업을 하고 일요일엔 농사를 지으니 시간은 토요일뿐이 없었다. 스터디공부를 하고 볼링도 치고 술도 마시곤 했다. 가정학과 친구들이 원예학개론이 있어 같이 수업을 들으며 우리집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체험도 했다. 출석수업을 받으며 수원으로 출퇴근하며 시험을 치르기도 했는데, 6월 부친이 회갑을 맞아 나는 교수님께 양해를 구해 하루를 빠졌는데 준철이가 수복강녕이란 글을 쓴 액자를 선물하며 과 친구들이 놀러와 축하를 해주는 등 자주 어울렸다. MT로 속리산도 가고 2년을 주경야독하며 잘 보냈다. 헌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924월 사고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50개월만에 퇴원하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아 학교에 알아보니 재입학 제도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5년만에 들어가니 준철이와 호섭이를 만났다. 다들 그만두고 자기들만 남았다고 하며 현숙이만 졸업했다고 한다. 현숙이는 유아교육학을 또다시 공부한다고 했다. 결국 9년만에 졸업을 했지만 친구들은 졸업을 못하고 결혼과 동시에 헤어지게 되었는데 유독 현숙이만 연락을 해 왔다. 훗날 부모님을 모시고 안산에서 낙지음식점을 하는 곳을 찾아갔는데 모친께서 하시는 말씀이 40일간 중환자실에 있는데 세 여자가 통곡을 하며 울더라면서 그중 한 친구가 현숙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숙이는 일찍 결혼을 하고 아기를 못 가져 10년만에 시험관아기를 성공해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돌잔치에 가서 축하를 해 주었지만 남아를 잃고 여아가 벌써 중학생이란다. 현숙을 마지막 본 것이 10년전 부친 장례식장이었지만 자주 연락을 했다

 





 

막내였던 꼬맹이가 결혼하고 어른 되었네

어느덧 세월지나 삼십년의 우정이라

흘러간 유수속에서 지천명을 바라보네

 





 

용인의 광릉 갈비집에 들어갔더니 나 보고 깜짝 놀란다. 우리는 육회낙지탕탕과 불고기를 시켰는데 모두들 맛있다고 놀라워한다. 반찬까지 모두 맛이 있다고 하며 놀란다. 말을 잘 하지 않던 길호도 맛있다고 하니 내가 기분마져 좋아 여기 온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술을 시키면 한 병이 남는데 두 병이 비웠다. 처제와 두 병 비운 것은 아마 처음인 듯하다. 처 역시 기분이 좋아 석 잔을 마신다. 이렇듯 맛있게 먹고 나니 흐믓하려니와 1인분을 장모님께 드릴려고 포장을 했는데 그것은 선물이라며 돈을 안 받는다고 하더란다. 네게 늘 형님이라 부르며 의지의 한국인이라 부르던, 내가 꼬맹이라고 부르던 사람. 나이 50이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 보았던 30년전 파란 하늘을 불렀던 그 시절의 모습 예나제나 늘 싱글벙글하며 웃는 소현숙사장님의 모습이 한결같아 보기 좋았다. 여하튼 기분좋게 취해서 집에 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주인장의 화사한 미소 소박하고 단백한 맛

친구 찾은 보람속에 진수성찬 따로없네

못잊을 맛깔스러움에 반해 다시 오자 합창하네

 

 





'해운의 일기 그리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부도에서  (0) 2019.03.25
해미읍성을 다녀와서  (0) 2019.03.19
당진 삽교천을 다녀와서  (0) 2019.03.04
한국이민사박물관과 자매의 생일  (0) 2019.02.26
외암촌과 신정호수를 다녀와서  (0)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