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아무런 사고없이 지나갔다. 언제나 그랬었다. 큰 일 때면 늘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허전한 느낌 그 자체였다. 제 아무리 오곡백과에 빛깔 좋은 동동주가 있어도 빈 자리는 부모님께 늘 죄를 진 기분이었고 공허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괜시리 쥐구멍 찾고 싶었고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장손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했었다.
그렇게 50여 년을 보냈다. 어딘가 한 구석에서는 예기치 못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장애의 먹구름이 보이지 않게 앞을 가로 막았었다. 말없이 지켜보는 부친이나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다독여 주신 모친에게나 할 일이 못되어 늘 가슴앓이로 지냈었다. 조상님께 장손의 길을 가지 못하는 죄책감만이 내 가슴을 짓 눌렀었다.
그리고 올해 나의 구세주가 되어 준 동반자가 나타났다. 만난지 넉 달째 그네는 아파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친에게 그리고 웃어른 께 공경을 해서 아파트에 사는 어르신이 다 알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오늘도 술과 더불어 안주를 가지고 어른들께 찾아가 올리고 돌아왔다.
예식장을 잡고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호텔을 잡고 청첩장을 찾아오고 패물을 맞추고 한복을 맞추고 다 늙은 신혼부부에게 축복이라도 하듯 척척 진행되어 가고 있다. 이번 추석 전날에도 그네는 앞장서서 진두지휘 하며 처음 대하는 동서들과 한마음되어 일을 보니 금방 끝이 났고 우리는 횟집에서 술 한잔하고 노래방으로 해서 4차로 맥주한잔 하며 우의를 과시했다. 그리고 추석날을 삼형제 내외 6명이 모친에게 다녀왔다.
동생들은 물론 제수씨들도 맘에 들어 하고 어느 해보다 값진 한가위가 되었다. 더구나 작년 이맘때는 부친께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는데 건강을 회복하더니 다치기 이전보다 몸무게가 훨씬 더 너가 맞는 옷이 없을 정도로 좋아지셨다. 사는 낙이 있어서 그런지 생전 하지 않았던 농담도 잘 하시며 항상 웃으신다. 지금껏 저지른 불효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듯 하여 나 자신이 즐겁다.
1학기 장학금이 나와 그중 일부인 30만 원을 주니 고맙다고 감격해 한다. 두 달간 한약과 더불어 침을 맞은 효험이 있어 발도 서서히 낫고 그네의 몸도 얼굴도 전보다 좋아지고 밝아지니 무엇이 두려우랴? 친구들도 축하한다는 말에 그들도 스스로 고마워한다. 다만 뱃살이 나와도 운동을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결혼식도 이제 한 달여 남았다.
이번 주부터 다시 운동을 하고 공부에 전념하련다. 뒤늦게 시작하는 새출발을 위해 내 자신을 위해 또 새로운 내 반려자 그네를 위해 부친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후회없는 삶을 누리려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가을이 왔습니다
한가위가 찾아 왔네요
어린아이 눈가에
어른 이마위로
고향 하늘아래
모두에게 웃음짓는 풍성한 중추
모든 때를 잠시 잊고
조상님께 부모님께 그리고 친구에게
사랑이 넘치는 정으로
비록 찾지 못할 상황이면
마음속으로
넉넉한 한가위가 되소서
건강과 행복이 넘치는
가을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