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께 페암이라는 말을 했다. 처음엔 무덤덤하게 받아 들이시더니 이내 말씀이 없다. 갓 시집온 아내와 흠뻑 정이 들어 농담도 하시고 장난도 잘 치시며 서로에게 정을 흠뻑 주고 받았다. 근 20년 된 동생 내외들에게는 인사 한마디가 전부이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목욕도 시켜 드리고 뽀뽀도 해 주고 살갑게 대하니 부친께서 마음을 여신 것이다. 80평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는데 그 정이 서서히 막을 내리려 하니 기가 막히신 모양이다.
고민을 많이 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염려가 되었고 혹여 곡기라도 끊으시면 어떻게 하나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아셔야 주변정리도 하시지 않을까 하고 아내와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 한 끝에 말씀 드리기로 결정을 내리니 답답하던 이내 가슴속에서 뭔가 치올라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내 드려야 하는 것일까? 자식된 입장에서 차마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아셔야 하겠다 싶어 말씀 드리고 주치의를 찾아가 보충설명 해 주십사 하니 회진을 돌 때 차분하게 설명을 하시니 수긍을 하신다. 그것을 보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한평생 농사를 업으로 그리고 사회봉사를 하신 부친이요 큰 자식의 깊은 상처로 고개를 못 든 부친이시다. 자나깨나 자식 걱정에 한 세월을 보냈고 늦으막에 호강 한 번 받아 보려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내 평생 불효만을 저질렀는데 이제 효도 좀 하려고 하니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결국 돌아가시는 날까지 불효만을 저지른 셈이다. 그래도 지난 몇 개월을 웃음 속에서 보내니 한 짐 벗은 셈이나 돌이키면 다시 멍에를 쓴 꼴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무리 인터넷을 찾아본다 해도 당자만 하겠는가? 마음고생 몸고생 하시는 꼴을 어떻게 지켜봐야 할까? 수 주가 될 지 수개월이 될 지 장담은 못하지만 돌아 가시는 날까지 고통을 감수해야 할... 부친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다행히 아내는 잘 이겨내고 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절대 부친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불효만을 저지른 내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만다.
사회복지사가 할 일이 참으로 많다. 그 꿈을 꾸게 된 것 중 하나가 부친이었다. 비록 정성을 다하지 못했지만 늘 부친 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맺기도 전에 부친은 내 곁을 떠나려 하신다. 나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을까? 수 일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부친은 당신을 버리고 아내를 주시는 것 같아 피맺히게 가슴이 저리다. 1년만 더 사시면, 아니 6개월만 더 사셨으면...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아버지!!! 집에 와서 목놓아 불러 보지만 세월은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또 그렇게 야속하게 흘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