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짧은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편안한 도시하면 난 단연코 안동이라 답하리라 그것은 편안할 안자가 있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안은 안산도 있고 안양도 있다. 그러함에도 안동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의와 충절의 고장이요 교육의 도시이요 양반의 도시일 뿐이 아니다. 간고등어가 유명한 곳 하회탈이 있고 안동댐이 있고 평화롭고 조용하기도 하다. 그리고 내 동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예의와 충절의 고장 조용한 곳 고을이여
양반과 하회탈이 어우려진 참모습이여
이름도 편안한 동네 안동은 빛나리라
안동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도청이 들어설 곳이기도 하다. 전국을 많이 다니진 못했지만 그래도 안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람 차 온 것도 아니다 사장어른께서 별세하셔서 갑자기 왔다가 두 시간도 안 되어 바로 올라온 것일 뿐 언젠가는 다시 찾으리라 생각하고 올라왔을 뿐인데 그럼에도 많이 생각나는 것은 시가지가 조용하고 옛날 모습 그대로의 기와집하며 택시기사의 친절함에 반해서이다.
지난 주말에 장모님을 모시던 처가 식구들이 본가에 갔다. 어른께서 편찮으셔서 모두들 안동으로 내려갔고 우리가 처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잠을 자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들은 일요일 밤에 돌아왔고 이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한다. 금요일부터 힘이 빠진다. 뇌경색의 전조현상이다. 심하면 응급실에 가야 한다. 집에 오면서도 동서네 걱정장모님 걱정 내 걱정에 우리 둘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자커니 안된다니 마음은 여러 갈래
아픔을 뒤로하고 문상을 다녀오니
희생한 몸상태위에 반겨주는 가족애
오전에 처가 내게 상의를 한다. 상조회 하나를 처제에게 주자는 것이다. 동서가 장모님을 모시는데 우린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고 그것을 양도하자는 것이다. 아주 예쁜 생각을 했다며 적극 찬성했다. 처제에게 말하고 저녁에 동서랑 같이 오라고 했는데 처제가 알아보니 시아주버니께서 들어있다고 하면서 마음만이라도 고맙다고 연락이 왔다 헌데 정작 저녁에 일이 터졌다.
팔의 힘은 여전히 빠진다. 이렇게 오래도록 빠진 적이 없었다. 응급실에 가야하나 걱정만 앞섰는데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나도 나이지만 처가 더 걱정을 한다. 일단 안동에는 못간다고 연락을 했다. 동서든 처제든 이해할 것이라 자위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장모님도 걱정되어 둘 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날이 밝자마자 가서 쓰러져도 가자고 말을 했더니 처가 두말 않고 따라 주었다.
세월은 흘러흘러 나이를 먹는구나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변화는가?
모두가 그러할진데 장례문화도 간소화라
아침 7시 반에 밥을 먹는둥 마는 둥 하고 9시에 집을 나셨다. 안양에서 10시 차를 타고 시외버스를 타고 안동으로 내려갔다. 시외버스를 타 본 것도 오랜만이고 세 시간을 넘게 탄 것도 오랜만이다. 왼손으로 계속 오른팔을 주무르며 더 악화되지 말라고 주문을 외웠다. 처가 처남댁에게 장모님을 잠깐 부탁을 하니 장모님이 해결 되었다. 불편함이야 감수하면 되지만 상가에 안가면 동서나 처제 얼굴을 눈 뜨고는 못 볼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 가니 동서랑 처제 모두 반긴다. 처제는 그 와중에서도 내 걱정만 한다. 몸은 좀 괜찮냐고 수없이 물어본다, 처제사랑은 형부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문상 온 것을 잘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돌아 올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수원에 산다는 사돈의 친구 덕으로 수원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이튿날 오전에 처는 장모님께 달려가고 난 몸이 시원치 않아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처는 시가시간 마다 내 안부를 묻는다. 오후가 되니 조금 나이지는 듯 하다. 세시 반경 모든 것을 다 끝내고 올라오는 중이라고 처제에게 문자가 왔다. 시대가 바뀌니 관혼상제도 바뀌는 것일까? 49제도 삼우제도 탈상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니 세상 참 편해졌다. 돌아가신 분만 묘에 묻혔을 뿐이다. 간소화 간소화 하더니 정말 간소화가 된 것이다.
동서여 아픈마음 얼마나 쓰리겠소
잊고 싶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리다
망우물 그래서 필요하다오 내일은 또 해가뜨리
저녁에 처제가 나를 데리러 왔다. 안양에서 만나 일행 여섯명이 참치회로 포식을 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사 지낸 날 자식들은 이렇게 먹어도 되는 것일까? 내가 너무 고전적일까? 하며 생각과는 달리 나도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주로 동서와 처의 이야기 일뿐이지만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 자식들은 이렇게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옛날 같으면 죄인일텐데 그래도 이렇게 회포를 풀며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동서가 더 존경스럽다. 멋진 사람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의미에서 가족의 단결을 외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이 아닐까? 길고도 짧은 삼박사일이 지나간다.
2018..1 25
'해운의 일기 그리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광성보를 다녀와서 (0) | 2018.02.05 |
---|---|
와우정사를 다녀와서 (0) | 2018.01.31 |
일산 호수여행 (0) | 2018.01.15 |
모친 12주기 (0) | 2017.10.11 |
못다핀 꽃송이들 (0) | 2017.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