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참 파란만장한가보다. 특히 내게는 남 보다 좀 더 심한 굴곡이 있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2/3는 달려왔다고 할 수 있을까? 일곱번의 생사의 기로에서 오뚜기처럼 또 일어나 앞을 달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영향을 미친 분은 조부님이시다. 세살 때부터 할아버지 돌아가시던 28살까지 늘 한방에서 잠을 같이 잤었다. 그분은 늘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시다. 늘 검소하셨고 부지런하셨다. 그리고 참을 忍자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수신제가와 호연지기, 은인자중을 내 스스로 배우게 하셨다.
조부님은 비가 와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가마니를 짜거나 멍석을 만들거나 수수비를 매셨다. 늘 준비하고 실천하고 무언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조부님께서 부르신다. "이젠 어디 가면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다녀 왔으면 다녀왔습니다 해야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또 부르신다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다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 어머니라 부르라." 그 이후 '엄마'라는 소리를 해 보지 못했다.
중학교에 붙었다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신 조부님. 고등학교에 붙었다고 기념으로 제기를 사신 조부님. 우리에게 엄하게 하지만 바르게 길러 주신 조부님. 제대하고 직장 다닐 때 교통사고 나서 4개월을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회사에서 KS 마크를 획득하고 실험실에 근무 할 때였다. 실험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 자리를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해 왔다. 내 자린 다른 사무실로 옮겨졌다. 그래서 몸 좀 추스릴 겸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그 때 여동생이 권해서 송광사에 다녀 왔었다. 법정스님께서 대회장으로 계셨을 때 거기서 받은 수계가 海雲이다. 바다의 뜬 구름처럼 넓게 생각하라 하시면서 30명의 수계를 받는 자리에 나만 유독 불러서 설명을 해 주신다. 조급히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결혼도 아주 늦게 하라 하신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제 사 무슨 얘기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스님은 앞날을 내다 보신 듯 하다. 그리고 내 수련은 아직 멀었나 보다.
태어나기 전 모친의 배내감기로 앓으면서 6개월을 안양으로 수원으로 인천으로 서울로.. 그래서 살려 낸 것이 나이고 그 보답으로 언어장해요 수족장해를 훈장으로 안아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5년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초에 불과하다. 온 몸이 ?기고, 꿰매고, 붙이고 상처 투성이다. 2002년 7월 사업실패로 인한 생각하기도 싫은 일까지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였지만 그 때마다 조부님께서 보이지 않는 힘을 주셨다.
“이웃사촌”이라 하여 옛날 같으면 다정스럽기 그지 없었던 이웃도 조그만 이익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를 붉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지 그런데 부모와 자식간에, 또는 형제자매간에도 그런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를 骨肉相爭 이라 한다. 유산 때문에 형제가 갈라서는 경우는 흔하며 심지어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도 가끔 보인다. 형제라면 서로 돕고 위로해야 마땅하거늘 그럼에도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있으니 이보다 더 슬픔이 어디 있으랴마는 콩을 위해서 라면 콩깍지라도 태울 줄 아는 그런 미덕 요즘엔 찾아 보기 힘들다. 조부님과 스님은 내게 이런 아픔을 승화시키려고 온갖 고통을 주셨나 보다.
건강한 웃음이 있는 곳에 불행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육체가 건강하다 할 지라도 마음이 병들면 스스로 낙오자일뿐만 아니라 인생의 패배자일 것이다. 아무리 육체가 병들어도 정신만 건강하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뿐만 아니라 성취감을 맛 볼 수 이는 보너스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풍족하지는 않으나 마음의 여유를 찾는 安貧樂道야말로 값진 보석이 아닐 수 없다.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부님의 따뜻한 정을 베풀어 주신 힘이 바탕이 된 나만의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
21년만의 사초. 내년엔 22주기를 짝과 함께 술잔을 올리고 싶다. 내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리라. '당신은 내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