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 밭에 미루나무 몇 그루가 세상을 내려다보듯 우뚝 솟아 있다. 논과 밭의 대변자인 양 계절에 민감한 그들은 저희들 세상이라고 여러 빛깔로 변하는 잎새마다 전설을 담고 내려 앉는다. 수십 년 전 건너 밭은 홍수를 만났다. 황폐화가 될 뻔한 그 곳은 미루나무 덕택에 피해를 많이 덜었었다. 철마다 새떼들이 날아와 보금자리를 만들곤 하지만 수많은 연륜으로 이제는 미끄러운 표면이 무척 거칠어 졌다.
어제 모처럼만의 나들이에서 늙음이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였다. 농부와 노인. 인사를 하자 함박 짓는 농부의 얼굴에서 조그마한 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 묻지 않는 손길에서 가식이 없는 행복을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잠시나마 찾았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 노인 무남독녀 외동딸은 시집을 가고 할머니와 두 분이 사시는데 할머니마저 눈이 안 보이시어 집에 계신단다. 우리 가정도 농사를 짓지만 정말이지 못 보겠다. 도시에서 사시면 경노당이나 가실 그 연세에 노인은 손수 밥을 지으시고 할머니께 상을 바친단다.
노인의 낙이 무엇일까? 없다고 말씀하시는 노인의 말씀에 무한히 외치는 울음 섞인 표정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세상이여... 하는 표정을 나는 내 눈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자 어떤 분이 불우 노인인가? 언뜻 돌아가신 조부님을 생각해 보았다.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의 이마가 나를 슬프게 하지만 낙도 모르는 채 살아 가시는 그분에 비해 여러 가족이 있다는 나는 어느 한편으로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노인의 이마에 너울지는 노 기운은 차마 만져도 못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점심을 잡수시라는 권유에 잠시 잊고 도시락을 펴신다.
늙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드시니까 불타던 젊음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고 어느 새 팔순의 고령에 서 계시다. 늙음은 슬픔이 아니다. 병은 더더욱 아니다. 그 노인의 주름진 고령은 또 하나의 생명을 보호하는 인도주의자가 아니겠는가? 불우 노인 돕자는 캠페인에 앞서 생각에 그치지 말고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우리 밭에 미루나무가 없었던들 그 때의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노인들 아니 늙은 나무도 그렇다. 노 기운은 젊음을 태운 희생자이요, 경륜이요 요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