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소리소문 없이 봄이 다가오고 있다. 평창 올림픽이 성대하게 끝났다. 회갑연이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끝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3월이 왔다. 20여년 된 동백도 나를 반기듯이 봉우리가 빨갛다 조금 있으면 활짝 피어나리라 개발선인장도 시샘을 하는 냥 아름답고 붉게 피어나 봄을 두드린다. 봄 하면 나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생과 개나리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차가운 겨울을 뚫고 나와 이 자리에서 있는 것이리라, 만물이 생성하는 계절 그래서 좋다.
세상은 참 기기묘묘하다. 눈이 녹고 얼음이 녹고 버들강아지가 춤을 춘다. 추웠던 그래서 움츠렸던 동작에서 기지개를 펴고 새들은 하늘짓을 할 것이요 자연은 봄에 입맞춤 할 것이요 사람은 새 세상의 오묘한 맛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삼라만상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을 향해 달려 갈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다. 하지는 못하지만 육상의 한국신기록은 줄줄 외우고 다녔다. 모교가 축구부가 있어 응원을 많이 다니곤 했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에 이어 바둑까지 그리고 국제게임은 섭렵하여 지금도 스포츠라면 밤을 지새운다. 특히 이대호의 야구라든가 EPL 그리고 월드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경기는 빼놓지 않고 보게 된다. 지난달은 기분을 만끽한 달이었다. 넘어져도 일어나 1등을 한 여자 쇼트트랙이라든지 국민영미의 신드롬을 일으킨 컬링이라든지 암튼 보고 또 봐도 재미가 있었다.
이번 달부터는 프로축구가 개막되었고 날마다 TV앞에 떠나지 못하게 할 프로야구가 개막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만 어려서 고생하고 남들에게 봉사하는 모습에 반해 이대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사인볼까지 받았다. 해서 그의 경기라면 롯데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찾아보았다. 그의 열성팬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의 경기는 빼놓지 않고 본다. 축구든 농구든 내가 좋아하는 팬이 있어 저녁이면 늘 그들과 함께 숨을 쉰다,
나는 원래 손재주가 없다. 지금도 젓가락을 잘 못 잡는다. 말도 잘 못한다. 내 말 알아듣는 이는 별로 없다.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운동회서는 꼴찌는 무조건 내차지였고 고등학교때 제도는 내가 받은 유일한 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긍정적으로 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칠전팔기보다 더한 팔사구생이란 말을 한다. 비록 내가 만든 단어이지만 여덟 번 죽었다가 깨어난 나이기에 모든 것을 받아드린다. 거기엔 세 사람의 은인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친손자이자 장손인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때로는 엄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대해 주셨다. 근면과 검소를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 가난한 우리집을 맨손으로 일으키신 분이다. 언제나 우리집은 마실방이었다. 밤늦도록 사람이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을 만큼 할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가장 키가 크시고 잘 생겼을뿐만 아니라 말씀도 잘 하셨다.
인사예절을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학교에 가거나 올 때에는 반드시 인사하라고 하셨다. 중학교에 합격하니까 호떡을 사 주시면서 이제 엄마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라고 하셨다 그 이후 엄마소리 못해봤다. 고등학교에 합격하니 춤을 추신다, 기념으로 제기를 사고 안양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 때 택시를 처음 타서 잊지 못한다. 그리고 술을 따라주셨다.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주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렇듯 할아버지는 몸 약한 나를 인자함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다.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면 단연코 할아버지라 말을 한다.
어머니는 무조건 내편이었다. 배내감기로 갓난아기를 업고 6개월간 안양, 인천, 수원, 서울을 나 고쳐 보려고 안 가본데 없었다고 한다. 남에게 늘 얻어맞고 와도 부드럽게 안아 주셨다. 가슴에 피멍이 든 것을 나중에 알았다. 도시락을 싸 줄 때 동생들 몰래 계란 후라이를 속에 넣어 주셨다. 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었을 때 내 앞에서는 강한 척 하며 밖에서는 울고 다니셨다. 오죽하면 병원사람들이 신명수엄마 울보라고 하였을까?
퇴원했는데도 어머니는 죄인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보냐고 항상 내리셨다, 어머니는 몸도 약한데다 장애인인 나를 끔찍이도 아끼셨다. 어머니는 동생들이 오지 않는다고 타박하실 때에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왜 그러느냐며 달래시곤 하셨다, 음식솜씨 뛰어나고 효부라 소문났던 어머니 나를 두고 어떻게 눈 감느냐고 하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새삼 보고 싶다.
결혼 10년째인 나는 그 자리에 처가 대신한다. 처가 없었으면 난 이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암에다 척추수술을 한데다가 워낙에 몸이 약한데 나를 끔찍이도 생각한다. 아니 어머니보다 더 한 듯싶다. 매일을 목욕 시키랴 약 챙기랴 간식까지 네 번 챙기랴 휠체어 끌고 운동 시키랴 바쁜데도 나에게 타박한번 안한다. 집안은 정리정돈은 물론이고 먼지하나 없다. 이 세상에 저런 천사가 또 있을까? 그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남과 절대 비교하지 않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내 인생의 후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는 몸이 약해 어디 다니지 못하지만 여행과 술과 노래를 좋아한다. 이제는 그나마 술도 한두 잔뿐이 못 마신다,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많이 다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지난달부터 노래교실에 나가라고 해서 나가기 시작했다. 음식도 골고루 해 준다 주로 채식을 하지만 고기와 계란 견과류, 과일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쓰는데 몸은 나보다 더 약하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여러모로 신경쓰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내가 타어난 해 흔히 말하는 58년 개띠라는 말이 있다. 1년중 가장 많은 100여만명의 사람이 태어났다고 한다. 헌데 올해는 전쟁 때보다 훨씬 덜 태어나 35만명이 태어나고 사망자가 더 많다고 한다. 내년엔 더 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 시골에서는 애기 울음소리가 없다고 한다. TV속에서나 들을 수 있다. 고령사회가 접어들었다. 아무리 저출산고령화를 위해 수백 조를 투자하며 외쳐 보지만지만 교육대책 없이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잘 살고 물질적으로 편해도 행복지수가 낮아지는 것은 무엇일까? 복지에 예산을 써도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봄은 소리없이 내게 왔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다시 찾은 봄은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씻어내고 기쁨과 설레임으로 맞을 것이다. 눈 속에서도 새 생명의 눈은 뜰 것이고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시냇물은 강물따라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집의 동백이 나를 반길 것이요 진달래와 개나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련도 활짝 펼 것이다. 환희이다. 봄은 내 가슴속에서 피어오른다.
2018년 3월 어느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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