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번이 처음인 듯할 것 입니다 개인적으로 편지를 쓴 것도 몇십년 전일 듯합니다. 이순을 지나 환갑을 지나니 수구초심인가 보네요 고향에 살면서도 선친이 그 곳에 묻혔으면서도 찾지 못하는 것은 아픈 탓도 있겠으나 내가 게으른 탓이겠지요. 언뜻언뜻 고향친구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나이를 먹은 것인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친구들의 목소리기 귓가에 맴도네요
이제 환갑을 지난 놈이 무슨 죽음타령이냐고 흉을 보겠지요. 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이렇게 편지를 써서라도 친구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칠전팔기라는 말 다 알겠지요. 나는 내가 그보다 더한 팔사구생이란 성어를 만들어 보네요. 여덟 번 죽었다가 아홉 번 살아난다는 말씀 나는 참 길고도 긴 삶의 끈이었지요.
하나 왕따의 세월
그 끈이 닳고 닳아 끊어진다 하여도 꿈에 보이던 어린 시절은 예전의 모습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깡통차기 술래잡기 구슬치기 등 여러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 신명수는 울보였고 따돌림의 대가였고 지금 흔히 말하는 왕따의 1인자였지요. 7살 어린나이에 한 두살의 형들과 학교 다니기도 벅찼지요. 9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입학을 했는데 영미와 나는 단짝이 되었지만 2학기에 이사를 가고 막내고모가 졸업하면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얻어맞아 울보가 되었고 남의 심부름은 물론 책가방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지나간 예기지만 5학년때 윤봉이가 하도 괴롭히니까 같은 반 현승이와 강호와 의기투합해서 윤봉이를 이겼는데 윤봉이 자당께서 왜 그랬냐고 우리를 혼낸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말을 잘 안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로 기억을 합니다. 희곡 새로 나온 달님이 있는데 나는 산수를 잘해 선생님이 수학자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녹음을 들려주었는데 내 목소리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 의기소침하여 말을 더 안하게 되고 가까운 친구 이외에는 거의 닫고 살았습니다. 그 따돌림은 중학교를 거처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별명이 기가 막힙니다. 잘 넘어진다 하여 건달, 애기, 울보, 애늙은이 헬레레 등등 아픈 상처가 많습니다. 수학박사는 잠시 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일찍 실습을 나갔다가 오니 가장 친한 친구 7명이 친목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단짝이었던 관명, 짝꿍이었던 대병, 3년간 같이 통근하였던 성중 내종 6촌이었던 흥석. 그 친구들도 결국 나를 외면해서 그들과 멀어졌습니다. 50개월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에 있는데 강호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동네에 목동회가 있는데 가입하지 않겠냐고 물어왔습니다. 가입하겠다고 하니까 이유도 모르는 채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동네에서도 멀어졌습니다. 유일하게 말동무와 더불어 손발이 되어준 친구가 윤봉이었습니다. 내가 살길은 공부와 장애인 사무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학교 공부와 더불어 공부한 것이 고사성어였습니다. 헌데 장애인들은 이익집단이었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상한 단체였지만 총무를 3년간 보고 나와 페인트사업을 했으나 빚만 지고 집에서 매일 술에 젖어 살았습니다.
갈 곳이 없는 나를 붙잡아 사람이 병환이였습니다. 56회 회장인 그와 함께 3년을 총무를 맡았는데 560만원에서 2100만원의 회비와 함께 많은 인원을 모았지만 나와는 인사 한마디 이외는 술 한잔 권하는 사람은 종찬이와 윤봉이 외에는 없었습니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방관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장 친했던 고향친구도 목우회도 명수야 술 한 잔 하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 인격수양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 술 한 잔 해요 하는 동생들도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 마지못해 합니다. 말을 못하니 안 하게 되고 점점 닺혀 있게 되고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만나면 야 반갑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 날씨가 좋다, 뭐 이런 식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쭈볏쭈뼛 있다가 맙니다. 그러니 내게 누가 말을 걸어오겠습니까?
말을 못하니까 대신 글을 쓰게 됩니다. 중3 72년부터 지금껏 쓰고 있습니다. 일기를 오래 쓰나보니 낙서가 되고 수필이 되고 시와 시조가 됩니다. 그것이 수백여 통의 글이 되어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내 블로그에 십 여 만명이 다녀갔습니다. 10여년 전 부터 월요아침문자를 했습니다. 처음엔 대 여섯 명에게 했는데 반응이 좋아 200명으로 늘었습니다. 많은 답장이 왔는데 정작 고향친구들은 10년동안 보내도 한 번도 회신이 없었네요. 말을 할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늘 기도를 합니다만 이미 지나간 세월입니다. 내 꿈은 의사요 공무원이요 시인이었습니다. 손발이 시원치 않아 의사는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현역판정을 받고 신고식을 못해 방위판정을 받았는데 공무원도 면접이 있어 포기해야 했습니다. 말을 못하니 글을 쓰게 됩니다.
요즘 꿈을 많이 꿉니다. 60년대의 어린 시절을 많이 꿉니다. 재미있게 놀았고 허물없이 보낸 시절 많이 싸웠고 이끌어 주던 시절 그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사람이 강호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강호가 가장 많이 나타나고 그 다음이 창용이입니다. 깨고 나면 아련하게 떠 오로는 추억입니다. 나도 이제 늙었나봅니다. 수구초심이랄까? 고향친구들과 사는 이야기도 좋고 삶이라도 좋고 그냥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만 전화 한 통화 문자 한 통화 없네요, 내가 먼저 하면 구걸하는 느낌이 들고 안하니까 할 말이 없어 못합니다. 그래도 꿈은 여전히 고향의 꿈만 꾸게 됩니다.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장애인복지관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탁구를 치면서 그릅활동 하면서 다른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나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구나 하며 음악 6만여곡을 다운받아 멘트 안하는 장애인 음방을 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고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자원봉사도 하고 여유는 없으나 더불어 삶이라는 마음으로 장애인복지관 협회 월드비젼 민들레국수집 노인복지관에 기부를 하게 되었고 그런 삶이 나 자신을 지탱하게 하 줍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분이 좋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둘 팔사구생
팔사구생 나는 여덟 번 죽었다가 깨어난 목숨 질긴 놈입니다. 부모님 결혼 5년만에 나온 내가 배내감기를 앓았다고 합니다. 핏덩이를 안고 안양 인천 수원 서울로 5개월을 다녔는데 영등포 명소아과라는 곳에서 명의를 만났는데 못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 각서를 쓰고 주사를 맞췄는데 집에 오니 죽더랍니다. 겨울이면 파 묻었을 텐데 한 여름이라 창피에서 윗목에다 두고 밤이 되면 묻으리라 하고 기다렸는데 오후 5시경부터 살아나더랍니다.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약을 써서 살아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혀가 굳고 손발이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내가 쓴 글씨를 보고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발로 써도 그것보다 나을 것이다 라고 꾸중을 하셨습니다. 내 글은 남이 잘 못 알아봅니다. 이러니 기계 기구는 물론 칼 가위 젓가락질도 잘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젓가락도 남들은 고기를 자르는 도구라면 난 쌀 한 톨도 집지 못하는 장식용입니다. 94년에 병원에서 컴퓨터를 샀습니다. 워드는 컴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먼저 하는 작업입니다.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으며 가르치기도 했는데 후배들과 시험을 봤습니다. 필기는 2급과 3급이 있는데 많이들 떨어졌지만 붙은 사람도 여럿이 있었는데 나는 실기에서 2급은 물론 3급도 떨어졌습니다, 분당 100타이면 다 붙는데 워낙에 늦으니 그것도 안 되어서 헛웃음만 삼키고 남을 축하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평생 핸디캡을 안고 살았습니다.
두 번째는 중1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폐렴으로 한 달간 박에서 나오지 못하고 방에서만 살았습니다. 1학기 통지표에 현광이가 1등이고 내가 5등이었습니다. 헌데 공부는커녕 아무것도 못하니 모친께서 굿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심하게 앓았습니다. 모친께서 마루로 나와 라디오라도 들으렴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학기때 열흘간 결석을 하며 찬바람 나니 살아났습니다. 세 번째는 동네 저수지에 목욕하다가 물에 빠진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간신히 구해 주셨습니다. 명도 참 깁니다
고3때부터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물론 학과장님도 놀라셨습니다. 제대하고 알루미늄 샷시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자격증에 매달렸습니다. 1년에 한 개씩 땄습니다. 엄계장이라는 분이 나를 보더니 품질관리과에 데리고 갔습니다 위험물 취급주임으로 안치고 1년간 매달린 끝에 KS를 취득했습니다.눈이 온 크리스마스이브날 출근길에 8톤 트럭이 치어 진문이 여동생 추자는 경상을 나는 10주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늘이 도운 네 번째의 죽음의 길에서 벗어났지요.
2년을 쉬고 동물약품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내겐 가장 행복했던 봄날이었습니다. 손이 부자유스러운데도 안전관리와 위험물취급 자격증으로 들어가니 다른 친구보보다 초봉 5만원을 더 받았습니다. 거기서 나를 인정해 주는 두 번째 분을 만났습니다. 공장장님이었습니다. 점심마다 장기를 두었는데 공장장님께 여쭈었습니다. 남보다 굼뜨고 말도 못하는데 왜 좋아하냐고 하니까? 남보다 솔선수범해서 타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방통대 다니고 싶다고 하니까 기특한 생각이며 졸업하면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5년을 입원했으니까 9년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92년 4월 3일 신명수인생 조졌다 하는 울부짖음과 더불어 정신을 잃었습니다. 다섯 번째 죽음이었습니다. 40일간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두 번이나 가족을 불러 들였습니다. 장례치를 준비하라고 그당시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이 시체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초원도 모든 것이 눈만 감으면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이상하게 많은 사람이 병문안 왔을 텐데 유독 현승이만 기억을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만 생각하면 그렇고 또 하나 내 여동생이 일주일간을 내 대신 일기를 써 놓았습니다. 그것은 훗날 발견했습니다.
2002년 여름이었습니다. 집은 넘어가는데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못되었습니다. 페인트가게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도의 한 여관방에 들어갔습니다. 수면제 30알을 털어 넣었습니다. 사흘만에 깨어났습니다. 타의에서가 아닌 자의에서의 첫 번째 이자 여섯 번째의 죽음의 순간입니다. 이후로는 자살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을 반성했고 모친의 병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육십평생 가장 잘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입니다, 우리를 맺게 해준 진문이 처에게 늘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많이 싸웠습니다. 처가 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자제시키니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서로 도와 우울증을 극복하니 내가 병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생로병사를 보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합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거나 무관심했다면 불구가 되었거나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 번째 생사였습니다. 처는 지금도 음식조절 해주고 매일 목욕시켜 주고 운동관리 해주며 일식4찬을 해줍니다. 남을 비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지지해주고 칭찬을 해 주고 하루에도 수 십번씩 사랑한다고 말 해 줍니다. 비록 강직성 척추염에 걸려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와 더불어 하루에 수십알의 약을 먹고 패치를 붙이며 노인 아닌 노인의 행세를 하지만 모든 것을 지지해 주고 응원해 줍니다. 두 번째 쓰러질 때에도 급히 서둘러 마비를 면하게 해 준 이가 처였습니다.
처는 척추와 암과 더불어 작년 봄에 팔을 수술했습니다. 휠체어를 너무 밀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몸이 워낙에 약한 탓도 있지만 내 건강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햇볕을 봐야 한다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 물왕리에 다녀옵니다. 갔다오면 파 감치가 됩니다만 처가 아파하면 내가 못하게 할까봐 밤에 끙끙 앓면서도 내게는 내색을 안 합니다. 처 자랑하면 팔불출이지만 처는 내개 있어서는 천사입니다.
육십년을 살면서 부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따돌림이고 왕따고 이제 그런 것 다 잊고 삽니다. 고향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기전에 책 한권 내는 것과 사진 한 번 찍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입니다.. 고향친구들과 여행을 세 번 했습니다. 첫 번째가 76년 4월 현승의 입대로 용산까지 전송한 것이고 종철 강호의 입대로 인해서 인천자유공원에 간 것이고 두 번째가 20대 중반에 하조대 피서를 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3년전에 목우회에서 남이섬에 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작년 가을에 덕환이가 동해안을 구경시켜준 것 이외에 고향친구들과 인연이 별로 없습니다. 결혼할 때 함도 윤봉이때만 참석 했을 뿐 외면당해야 했습니다.
셋 벽을 넘어 정으로
우리집은 옛날에부터 술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엄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분들과는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우리방이 밤마다 마실방이 되었고 화투에 약주에 담소를 많이 누누셨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오신분이 태경이 아버님이셨습니다. 동네 이장이기도 하거니와 할아버지와 잘 통하셨고 화투도 안하셨는데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때에도 내가 사고이전엔 많은 사람이 오가며 술 한 잔 하고는 지나가셨습니다. 그러던 내가 커서는 우리집이 절간처럼 조용합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은 장애인이었습니다.
나는 목우회에 많은 애착이 갑니다. 20대 중반 때 총무를 보다가 회비를 노름에 써서 돼지를 팔아 메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목우회인데 그것도 삼년전 부터 요즈음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예전에 우리집에서 두 번 했는데 두 번 모두 모친께서 개를 잡아 주셨습니다. 목우회가 지금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내개도 잘못은 있지만 서로 남 탓만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요만 많은 사람도 아니고 십여명인데 내가 조금 양보하고 배려하고 아껴주는 미덕이 아쉽습니다. 남의 탓한다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 자존심은 버려야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가까운 예 몇 개만 들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40대에 칠우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버지 일흔이 넘도록 이어 오셨습니다. 우리 막내 고모 아직도 간호사인데 우리집은 오지 안아도 두 달에 한번 안산에 온다고 합니다. 내 동생들 세 명이 58, 60, 62회 모두 동네 친목회들이 있어서 모두들 두 달에 한 번 만난다고 합니다. 그 중 어려운 사람들은 서로 돕고 회비를 대신 내주기도 하고 면제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죽마지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안부 묻고 끌어주고 밀어주고 그런 것이 우요 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막내가 요즘 고충을 겪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너는 당분간 회비 내지 말라고 해서 안 낸다고 합니다. 회비가 문제가 아니고 끌어주는 힘 밀어주는 힘 그것이 자존감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목우회 부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건상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친목회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친묵회가 힘들면 1년에 한 번만이라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물으면 인사하고 술 한잔 하고 헤어지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늦었지만 더 늙기 전에 고향친구들과 사진 한 장 찍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고 바램입니다, 그것을 위해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그간의 못다한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들 늙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알겠지만 치현이는 지금 암과 싸우고 있습니다. 나도 하루에 수십개의 약을 먹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운동을 합니다. 안하면 당이 올라가고 하면 발에 고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약을 더 먹게 되면 지방간이 생기고 간 약을 먹고 이런 악순환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늙어갑니다. 더 늘기 전에 친구들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근황을 물어보고 자식 자랑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옛날에 함을 팔러 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 고향친구들을 하나하나 불러봅니다. 진문이, 현승이, 강호, 창용이, 현태, 종철이, 윤봉이, 인식이, 영춘이, 치현이, 문용이, 덕환이, 태경이 때로는 그립고 때로는 아쉽고 때로는 보고싶은 고향친구들입니다. 언젠가 이름으로 그들만의 시조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지금 남과 북이 만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꿈도 못 꾸겠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북과 미가 만나고 있습니다. 외신에서 북한은 속이고 중국은 비핵화에 의지가 없고 한국은 무능하다고 보도되었습니다만 우리에게 전쟁이 없고 평화가 온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요. 그래도 아제 하나하나 내려놓을 때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빨리 앞서가는 것은 금물이겠으나 변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진보는 별로이지만 화해가 된다면이야 진보 보수같은 것은 자연히 희석되겠지요. 60년지기 친구들 내 소원 하나 들어주면 안 되겠는지요? 이글을 보게 되면 답장을 해 주세요 안부의 전화든 문자든 카톡이든 좋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만 마칩니다.
2018년 6월
신명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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